행복한 백수
(2012년)
직장에 다닐 때 퇴직한 선배들을 만나면 퇴직하면 처음 몇 달 동안은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그런데 여행을 하고 노는 것도 한두 달이지 몇 달이 지나면 차츰 답답해지고 하루하루가 지루하다고 했다. 그 때 나는 과연 그러할까? 생각했었다. 그런 내가 선배들의 뒤를 이어 퇴직을 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났다. 먼저 퇴직한 선배들 말대로라면 석 달이 지난 지금부터 슬슬 답답해지고 하루하루가 지루해져야 한다. 그런데 글쎄, 한마디로 무어라 말할 시기는 아니지만 나는 감히 ‘그렇게 지루하지도 않고 답답하지도 않다.’ 이다.
요즘 들어 하는 일 없이 지내는 시간이 너무 좋다. 하는 일이 없어도 하루하루가 지루하지 않고 심심하지도 않다. 퇴직 후 석 달이 지난 요즘의 내 하루 일과다. 새벽 다섯 시, 핸드폰 알람소리에 기상을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거실에 나와 냉수를 반 컵 정도 마신다. 거실에서 10여분 스트레칭을 하고 몸을 풀어 준 다음 집사람과 하천 둘레 길까지 5분 정도 걸어간다. 하천 둘레 길에서 6~7킬로 달리기를 하면 온몸에 땀이 흐른다. 한 시간 정도 달리기를 한 후 집에 와서 다시 10여분 스트레칭을 하고 몸을 풀어준 다음 샤워를 하고 개운해진 몸으로 아침 식사를 한다.
아침 여덟시, 집사람과 딸아이가 출근하면 나 혼자만의 시간이다. 따끈한 커피 한잔을 끓여 놓고 컴퓨터를 켠다. 혼자 느긋하게 모닝커피를 마시면서 잠시 인터넷 카페모임도 둘러보고 낚시 사이트에 들어가서 조황 소식도 알아보고 이런저런 뉴스도 검색해 본다. 한 시간 가까이 인터넷을 검색한 다음 10여 년 전 노트에 써 놓은 일기 글도 옮기고 가끔은 산문과 에세이 등 책을 읽고 글을 쓰기도 한다. 한두 시간 가량 인터넷을 보고 글을 쓰다보면 아침 달리기를 한 피곤이 몰려와서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그대로 자리에 누우면 30~40분 꿀맛 같은 낮잠을 잔다. 잠이 깨면 일어나서 다시 컴퓨터를 하다가 심심하면 낚시방송을 시청하고 이따금 책을 읽기도 하는데 요즘에는 법정스님의 ‘무소유’와 ‘아름다운 마무리’ 등 맑은 글을 서너 번째 읽고 있다. 법정스님의 맑은 글은 몇 번을 읽어도 느낌이 새롭다.
아참, 요즘에는 산에 다니고 있다. 아침식사를 하고 나면 고향에 있는 선산에 가서 밤나무와 매실나무 등 유실수를 심고 이따금 인근 수목원에 들러 옥향과 영산홍을 사다가 산소 둘레에 심고 있다. 그리고 자동차에 톱과 전지가위를 싣고 가서 참나무와 아카시아 나무 등 잡목을 베어주고 웃자란 향나무와 영산홍 가지도 전지해 주고 있다. 두세 시간 가량 산일을 한 다음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혼자 점심밥을 차려 먹는다. 요즘에는 마른 김을 약한 가스 불에 구워서 손으로 싸먹고 있는데 얼마나 맛이 좋은지 모른다. 혼자서 밥을 먹는데도 밥맛이 어찌나 좋은지 다른 반찬이 없어도 고봉밥을 먹고 있다. 섭취하는 칼로리가 많아서 그런지 아침마다 열심히 달리기를 하고 있는데도 좀처럼 뱃살이 빠지지 않고 있다.
오후 점심식사를 하고 나면 좋아하는 커피를 한잔 마시고 다시 컴퓨터를 켠다. 한두 시간 가량 컴퓨터를 하다보면 식곤증이 몰려온다. 퇴직 한 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자리에 누우면 곧바로 잠이 든다. 또다시 30~40분 꿀맛 같은 오침을 즐긴다. 잠에서 깨면 일어나 법정 스님의 맑은 글을 읽다가 글감이 떠오르면 두세 시간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고 이따금 배가 출출해지면 라면을 끓여 먹기도 하고 입이 심심하면 냉장고에서 사과나 곶감 등 군입거리를 꺼내 먹기도 한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기도 한다. 퇴직 후 기가 빠져서 그런지 세수도 하지 않고 아무생각 없이 그야말로 무념무상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혼자 거실에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면서 좋아하는 낚시방송도 시청하고 가끔 바둑 TV도 보다가 졸리면 그대로 낮잠을 자면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하루 종일 문밖출입도 하지 않고 무념무상 아무 말 없이 홀로 지내는 시간이 너무 좋다.
해가 길어지면 하는 일없이 바빠진다. 날씨가 포근해지면 고향 앞 바다에 나가 바지락을 캐고 소라와 고동을 잡는다. 호젓한 바닷가 자갈밭에 앉아서 바지락을 캐고 골뱅이와 소라와 박하지를 잡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다. 할 일이 또 있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날에는 카메라를 둘러메고 인근에 있는 산으로 소풍 겸 산행을 하면서 청청 고사리도 꺾고 이름 모를 야생화와 소나무 등 풍경 사진도 찍고 있다.
요즘에는 아카시아 꽃이 피는 오월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가슴 설레는 낚시여행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낚시 시즌이 되면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른다. 낚시하러 가는 날은 새벽 3시 무렵 기상한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혼자 밥을 차려 먹고 채비를 하고 나면 4시가 조금 넘는데 곧바로 자동차를 타고 낚시터에 도착하면 5시, 어느새 여명이 밝아온다. 고요하고 잔잔한 새벽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운 다음 세상사 근심걱정 모두 잊고 무심히 흘러가고 있는 찌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지루할 시간도 없고 답답할 여유도 없다.
대여섯 시간 가슴 설레는 낚시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할 일이 많아진다. 먼저 샤워를 하고 허기진 배를 달랜 다음 낚시가방을 닦고 낚싯대와 릴 등을 손질한다. 이어 다음날 낚시하러 갈 준비를 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정성껏 밑밥을 만들어 놓고 낚싯대와 릴 등 채비를 해 놓는다. 어쩌다 운이 좋아서 멋진 감성돔이나 농어 등 손님고기를 한두 마리 잡으면 인터넷 카페에 낚시 사진과 조황 글을 올리고 댓글이 있으면 하나하나 답글도 달아준다.
밀린 숙제를 마치고 은퇴를 해서 할 일도 없고 오라는 곳도 없지만 도무지 지루하고 심심할 겨를이 없다. 아침부터 느긋하게 모닝커피를 마시면서 인터넷을 하다가 잠이 오면 그대로 자리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잠이 깨면 일어나 낚시방송을 시청하고, 밤늦은 시간까지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다. 무엇보다 가슴 설레는 바다낚시를 시간구애 받지 않고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요즘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그동안 직장에 다니느라 하지 못했던 일,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퇴직 후 하는 일이 없어도 하루하루가 즐거운 나는 행복한 백수다.

낚시를 마치고 고향 앞 바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