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통영‘국도’를 낚시를 갔다가 꽝을 치고 나와서 우리 일행은 고성에 있는‘ 소가야’라는 유명한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나와 후배3명은 남해에 들려서 하루 더 낚시를 하기로 의기투합하고 남해로 향했다.
낚시 일행을 잠시 소개 하자면,‘청담’이라는 친구는 학원 국어선생이고 ‘성진’이라는 후배는 청주에서 LG화학을 다니는 주말부부다. 그리고 ‘유신’이라는 후배는 대전에서 횟집을 하는 후배다.
나도 그렇지만 참 대단한 사람 들이였다.
여기서 유신이란 후배를 잠시 소개하면 참 말도 안 나온다. 요새 길이 좋아졌다지만 대전에서 통영까지는 최소한 2시간30분에서 3시간을 달려야 올 수 있는 거리다. 그리고 배를 타고 1시간 정도가야 국도라는 섬을 올 수 있는데 그 거리를 10일 동안 7일을 대전서 통영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낚시를 했고 우리를 만나서 다시 남해로 가게 됐으니
그 피곤함과 금전적인 지출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으리라......
그리고 성진이라 후배는 주말부부데 그놈의 낚시를 인해 한 달 부부가 되었으니... 과히 낚시에 미쳤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거다.
아무튼 우리는 고성에서 남해 '창선도'로 향해가고 있었다. 차안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제수씨한테 전화들 하라고 오늘 못 들어간다고... 그리고 나하고 같이 있다는 말은 빼고서 해야 돼...“
그 소리에 전화는 안 하고 서로 눈치 보면서 웃기만 했다.
섬에 들어가면 기지국이 없는 섬이 대다수라 전화가 불통이 되니 미리 알아서 전화를 하라는 나의 배려였다.
하지만 이 때 전화를 안 해서 섬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으니..ㅠㅠㅠ
그때 조용히 운전을 하던 청담이...“형님, 우리 어머니가 절에 가서
제 사주를 보니 절더러 물 조심 하라고 했다고 하던데요.“라고 말했다. 나는 “청담도 그런 말 믿나?” 라고 말하니 청담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뇨” 짧게 대답했다.
나는 “야, 이양반아! 사주에 물을 조심하라고 하는 말은‘물수’자를 쓰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말이고 설령 그것이 아니고 진짜 물이라도 죽을 팔자라면 어쩔 수 없는 거야..“ 나는 담배를 하 나 피어 물면서 옛 이야기 하나를 그들에게 들려줬다.
“옛날에 어떤 사람 사주팔자가 몇 월 몇 일에 이 사람은 물에 빠져 죽을 팔자니 그 날 그 시간에는 절대로 먹을 물도 주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식구들은 그 사람을 방에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가 버린 것 이였다.
그리고 그 뒷날 식구들이 방문을 열고 그 사람을 보니 죽어 있던 것 이다.
그것도 방바닥에 물 수자 한 자를 써놓고 거기에 코를 박고 죽어 있던 거였다‘
그렇게 사람팔자 라는 것은 우리가 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닐꺼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우리는 연륙교인 창선삼천포대교, 삼천포창선대교를 지나고 있었다. 대교 이름들이 지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재미있게 유리하게 명명한 것을 알 수가 있지요 똑같은 대교인데, 창선에서는 창선 삼천포대교, 삼천포에서는 삼천포창선대교로 부르고 있습니다.
바다가 한 눈에 보이고 그 바다에 원시시대 때부터 사용했다는 ‘죽방렴‘이 많이 설치된 것이 보였다. 참으로 원시와 현대가 어우러진 풍경 이였다.
(※.죽방렴 이란 갯벌에 참나무 말뚝을 거대한 어항식으로 만들어서 일단 고기가 들어오면 못나가게 만든 원시적이지만 아주 과학적인 어업도구다)
거치른 난바다에서 참돔을 잡다가 남해에 내만을 오니 바다는 그야말로 호수에 가까웠다. 이 곳은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후세에 남겼다. 사실 고독한 섬에서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글쓰기 말고는 다른게 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의 유배 생활은 어쩌면 문학의 문을 열어준 해방구 역할을 했던 것이다.
(통영과 진주 그리고 남해의 여러 섬과 완도, 여수에 대해서는 시간이 날 적에 간략하게 다른 지면을 통해 소개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