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가 앉은 아침 항로로 김선장의 낚시선이 음악을 토하며 질주하고 있다. 기타와 노래를 사랑하는 김선장이라 그런지 선실에는 품질 좋은 오디오가 설치되어 있었다. 320마력 엔진의 스턴드라이브에서 출력되어진 힘으로 배는 무거운 바다를 하얗게 가르며 전속 항해한다. 내 콧속으로 스며드는 바람의 압력이 진정 살아있음을 증명하여 준다. 신이 내게 준 축복이며, 물질세상에서 오감을 작동하여 우주를 느낄 수 있는 것에 절대적인 행복을 느낀다. 아침의 바다에서 록음악과 항해의 질주를 느껴보라. 아, 생각하면 역시 오금이 저려온다. 선미에 자리한 엄사장의 모습이 너무 진지하다. 사실 나보다 진정 낚시를 더 좋아한다. 그 먼 수백리 길을 한걸음에 달려 올 정도니 손맛의 그리움이 어찌 나보다 적을까! 전자장비에서 수온이 13.7도를 가리키고 있다. 며칠 전보다 약 1.5도가 낮다고 김선장이 일러준다. 참돔은 알다시피 수온변화에 민감한데, 그 정도 수온이면 낱마리가 불보듯 뻔한 것이다. 엄사장과 난 예전에도 그랬지만, 아니 궁색한 변명같지만 조과엔 그리 연연하지 않았다. 단지 적당한 놈을 낚아 철수 후, 한 잔 술의 안주가 필요했던 것이다. 물골자리를 찾아 김선장이 앙카를 내렸다. 갑자기 좋아진 날씨라 포인트마다엔 낚시꾼들이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세사람은 각자 말이 없어 졌고, 손놀림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난 조끼의 포켓에서 몇 달째 질식해 있는 소품통들을 끄집어 내어 주었다. 소금기가 하얗게 앉은 것들과 서로 부딪혀 아우성치는 구멍찌들이 너털웃음을 짓는다. 누구나 다 같겠지만, 채비를 준비하는 이 시점이 꾼들에겐 황홀이다. 이제까지 낚시를 기다려 왔던 것과 저 밑 해저에서 곧 만날 대물의 모습이 채비를 하고 있는 순간에 모두 보상되어 진다. 과거와 미래의 부조리는 사라지고 이 순간 현재만 남아 있으며 마음은 끝없는 수심으로 빨려가고 있다. 애인을 마중 가는 길과 인생에서 새로운 철학을 얻는 기쁨이 여기에 있다. 드디어 낚대 끝에 달린 바늘에다 크릴 세 마리를 통통하게 꿰었다. 그리고는 그리움처럼 대양으로 찌를 흘려보냈다.
엄사장과 나, 그리고 김선장의 세 낚대가 동녘으로 나란히 뻗으며 파랑섬의 아침을 일으켜 세운다. 김선장의 콧노래가 본류대로 흘러가는 원줄을 타고 시간을 메우고 있는데, 엄사장과 나의 머리속은 하얀 색깔을 하고서 그의 노래소리와 곧 초릿대를 타고 전해 올 입질로 자아의 경계를 잃고 있다. 아, 손 맛! 흘러가는 밑밥에 시선을 뿌리다보면 간간이 엄사장과 눈을 마주치게 되는데, 우리 둘은 애써 수평선으로 촛점을 풀어 버리곤 한다. 낮은 수온으로 인한 시간과의 싸움이 이미 시작됐다. 종종 바닥에서 용치놀래기가 원줄을 새차게 가져가기도 하지만, 작년에도 이 곳에서 꽝을 친 엄사장은 대물 한 마리에게 혼을 빼앗기고 있었다. 낮은 수온은 참돔 대물낚시에 어려운 장벽을 만든다. *철저히 바닥을 공략함. *수심과 지형을 정확히 판독함. *조류속도에 밑밥이 앉는 위치를 계산함. *밑밥이 앉는 위치에 자신의 채비가 정확히 잠영함. 요정도의 조법만 터득한다면 참돔과의 시간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데, 그 게 그리 녹록하지가 않다. 잠수찌의 잠영속도와 조류의 세기에 따라 언제나 채비조작에서 오류가 생긴다. 이미 바닥에 걸려 있기도 하고, 허공에 둥둥 떠서 200m를 무위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론상 이러하지만 딱히 습득할 곳이 없는데, 실습을 통하여 몸으로 익혀야 할 뿐이다. 오로지 불가능한 공식으로 그 정답을 찾아내야 한다. 벵에돔 돌돔 감생이도 좋은데, 참돔이 더 특별한 것은 눈을 감아도 원줄에 전해져 오는 강력한 풀림이 매니아를 미치게 하는 것이다. 잠수찌가 입수한 순간부터 자신과 채비는 아마 일심동체가 되어야지 싶다. 그가 날개를 펴서 비행을 하며 떠오르는지 절벽을 지나 다이빙을 하는지, 굽이굽이 물길로 돌아가는 찌의 길목을 심안으로 지키고 있어야 한다. 낚시 중 잠시 일터의 걱정으로 정신을 빼앗기고 나면 찌의 행적을 놓치게 되는데, 여기에서 참돔의 조과는 서로 차이나는 법이다. 200m를 흘러가는 잠수찌에 인내심으로 그 감각을 붙잡아야 한다.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조종간을 잃게 된다면 그 붉은 입술과 정열의 육체를 끝내 안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오로지 한 마리만 잡힌다면 엄사장과 나는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쏨뱅이, 황놀래기같은 잡어로 시간을 풀다보니 어느 새 정오가 다 되어갔다. 세 사람은 다시 말을 잊었다. 김선장의 콧노래도 김이 다 빠져 버렸고, 짜릿한 손맛의 열정도 수온만큼 식어내렸다. 김선장의 아내가 곱게 장만해 준 도시락에 점점 궁금함이 더해지는 시간이다. 낚대는 자꾸 무거워 지고, 주위 섬들의 해송과 구름 깔린 하늘로 차츰 눈길이 흐른다. 그 건 입질의 궁핍에서 오는 꾼들의 허탈감의 반증이다. 생선회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내 딸이 엄마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왔다. 한 마리 잡았으면 빨리 오라고 성화가 심하다. 그래서 맛있게 지금 회 먹자고 엄마에게까지 다그친다. 그래그래 알았다, 약속대로 꼭 잡아서 썰어 주마. 결국 김선장과 엄사장은 도시락을 푼다. 나무 젓가락을 둘로 쪼개며 연거푸 수온을 탓하고 있다. “같이 식사해요?” 엄사장이 말을 꺼냈다. “아뇨, 한 사람쯤은 경비를 서야죠. 나중에 먹을께요.”하고는 27m의 해심으로 소금에 절인 원줄을 홀로 천천히 풀어넣는다. 여자만 직감이 있는 게 아니라, 남자도 한번 쯤 있는 것이다. 자신도 섬칫 놀라며 전해오는 순간적인 필! 저 어디 쯤의 협곡에서 담요를 덮고서 추위에 숨죽이는 참돔이, 자오선에 높게 걸린 태양의 군불로 방문을 열고서 마실나갈 준비를 한다. 담배 한 대와 길마다 어지럽게 흩뿌려져 있는 새우같은 것이-오랜 전의 일인데, 볼일 보러 가는 중 마침 하늘에서 하강하는 저 것들의 형체-그 맛의 새로움을 여태껏 잊어 본 적이 없었는데...... . 마실길에서 느끼는 신선함이란 이런 것이지. 오, 하나님! 오늘 무슨 날입니까? 간절한 기억의 저 것이 왜 신선한 마실길에 수없이 상을 차리어 한랭으로 밥맛 잃은 나의 미각을 되살아 나게 하십니까요? 사람이나 동물이나 배고플 때 같이 허기를 느낀다는 것은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생물의 법칙일까? 입질 타이밍의 필이란 감각기관의 외부에서 무턱대고 오는 것이 아닌, CPU의 기능에 오리무중한 산술과 완결되지 않는 오류로 정신과 육체가 무질서해지는 정점이라고 할까? 그 정점에서 신의 계시처럼 우리는 한 번씩 입질의 강한 필을 받는다. 알 수 없는 필! 그 필이 여지없이 현실로 닥쳐와 감동과 신비를 느끼며 릴링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우리는 낚시에 미쳐가는 게 아니라, 이미 미쳐있는 우리를 발견할 뿐이다. 미치지 않고서, 탐구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절대 세계를 제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할까?
대략 스풀에서 원줄이 30바퀴 쯤이나 남았을까? TV 리모콘으로 재미없는 드라마에 곧 채널을 바꾸듯, 흘려 보냈던 채비를 다시 회수할려는 그 때! 나선형으로 파마된 원줄이 세라믹 가이드를 훑으며 오른손 검지를 세차게 때리듯이 빠져나갔다. ‘촤르르르’...... . 마음의 굉음이다. 입질의 신호음이 뇌파로 흐르기전에 벌써 육체가 먼저 놀란다. 전립선 비대증에 요도가 찔금찔금 열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감성이라곤 하나없이 다 식어버린 중년의 가슴에 피가 거꾸로 쏟구쳐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카타르시스, 입질이다! 인공에 의해 만들어진 내 속의 불만족과 절망, 그리고 비애가 이 순간 망각의 강으로 흘러간다. 내가 애절히 잡으려 했던 것과 무수한 소원으로 갈구했던 것들이 다시 자연으로 복귀하는 시간이다. 비움인 것이다. 2호의 목줄이 해저에서 목놓아 우는 것 같다. 연질의 2호 낚대가 초장부터 그대로 고꾸라진다. 약간 잘려진 원줄이지만, 160m 쯤에서 참돔이 바늘을 찬 것이다. 대쪽같은 선비의 기질을 참돔이 아주 많이 닮았다. 질서를 흐트려 놓으면 초반 새차게 반항하는 것과 끝까지 방심할 수 없는 질주의 파워가 그 것이다. 힘 주어 당길수록 강하게 반응하는 것이 바로 참돔 대물낚시의 매력이다. 감생이가 이치를 깨달은 보수적 선비라면, 세상의 시류에 타협하지 않는 진취적인 선비의 기상을 이어받은 것이 바로 참돔이다. 50~75사이즈가 좋을 것 같다. 미터급 참돔은 낚시가 아니라 싸움이다. 대형참돔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워에 우리는 불감당의 그 무엇을 느낀다. 그 걸 잡기위해서 우리는 낚시를 하는 게 아니라 전투라는 것을 치루어야 한다. 80이상을 목표로 정한다면 여유있는 낚시가 불가능하다. 장비뿐만 아니라 채비 자체도 부자연스러워 무게로 인한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물론 사람마다 취향은 가지각색이라 딱히 우수함을 정할 필요는 없지만, 여태껏 해본 경험으로 볼 때 1.5~2호낚대로 잡는 적당한 크기의 참돔낚시가 제일일 것 같다. 싸움의 전투에서 만큼은 우리가 자연과의 합일을 절대 맛 볼 수 없기 때문이리라.
국민학교 3~4학년 때인가 보다. 약 35년 전의 일이지 싶다. 그 시절 바닷가 우리집에는 텐마가 한 대 있었는데, 무동력선이라서 바람이 약간 불라치면 출어를 포기하곤 했다. 띠동갑인 둘째 형님이 낚시를 무척 좋아 했는데, 한 번씩 외줄낚시로 팔래판 광어를 잡아올 때면 울엄마가 그렇게도 형님을 대견해 하였다. 때문에 자새에다 경심을 감고 채비를 하고있는 형님이 그 때는 나도 참 멋있어 보였다. 큰 광어가 많이도 잡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인가, 항상 곰곰히 쳐다보는 동생이 측은했는지 출조에 나를 동승시켜주었다. 철모르고 따라나선 그 길이었는데, 수심 깊은 동해에는 항상 정오쯤에 계절풍이 불어오는 법이었다. 채비를 묶은 자새 몇 개를 포인트에 던져서 부표를 꼽고는 형님과 난 물기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었다. 그러던 사이 나도 모르게 바람은 불어오고, 흔들리며 속을 부대끼게 하는 배를 그렇게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형님의 깐죽대는 웃음을 한으로 안은 채 나는 차츰 고통스런 멀미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배멀미가 그토록 사람을 잡는다는 것과, 또한 형님이 배려한 인생견습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점점 파김치로 변해가는 나에게 형님은 어느 덧 자새에 감긴 경심을 쥐어 주었다. 바로 서서 당겨 보라 한다. 광어가 물었으니 니가 한 번 잡아 보라 한다. 힘들게 겨우겨우 걸터앉아 형님이 쥐어 준 경심을 감아올려 보았다. 그 때다. 사정없이 빨려가는 원줄을 느껴보았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바다동물의 위대한 힘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첫사랑의 기억도 오래 가듯이 그 새로움의 낚시추억은 나이먹은 이태껏 지워지지 않고 있다. 불행한 교통사고로 조카 둘과 형수를 남긴 채 지금은 세상을 떠난 형님이지만, 내 인생에서 희열의 첫 손맛을 안겨준 멋진 인연이었다. 그 때의 기억처럼 이 시각 참돔이 낚대를 꼬꾸라지게 하며 발버둥을 치고 있다. 당겨진 활과 같이 휘어진 낚대가 너무 시원하다. 참돔은 제 집으로 다시 돌아가려 하고 나는 그녀의 형체를 안으려 하고, 이종끼리의 팽팽한 긴장이 여기 바다에서 펼쳐진다. 고기를 잡아야 한다는 원초적 행위와 종의 번식을 위한 몸부림들이다. 엄사장과 김선장이 뒤에서 응원을 하고있었다. 엄사장은 저녁 소주안주, 김선장은 대리만족! 내 딸래미의 압력도 한 몫으로 짊어진 채 해저에서 질주하는 참돔의 모습을 떠 올린다. 쳐박기를 네다섯번 하더니 낚대의 탄성을 이기지 못하고는 결국 밑바닥의 터를 나에게 내어준 것 같았다. 그러면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다. 바늘이 참돔의 입술에 설 걸리지만 않았다면 이 때부터 별 어려움없이 손맛을 느끼며 릴링할 수 있을 것이다. 삐걱거리는 낚대, 털털거리는 릴이 심한 고생을 한다. 오른팔의 엘보가 또 도질 것이다. 조류의 마찰과 어체의 무거움으로 약 10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는 쪽빛바다의 컴컴한 구멍에서 허옇게 쏟아오르는 어체를 보았다. 언제나 낚시를 하지만, 잡아 올리는 순간은 항시 새로움과 떨림이 엄습해 온다. 김선장의 뜰채로 무사히 랜딩을 하고서는 싱싱한 비늘에다 손을 얹었다. 전류가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형언할 수 없는 마음으로 드디어 70쯤의 참돔을 두 팔로 안게 되었다.
통머리 소금구이, 초밥, 맑은탕, 매운탕, 튀김, 그리고 회!
햇빛으로 그을린 얼굴을 섬물로 대충 씻었다. 비누칠을 해도 자꾸 끈끈해지는데, 아내도 연거푸 이상해 한다. 낚시장비도 덩달아 시원하게 민물샤워를 시켜주었다. 그러니 훗날의 고역도 잊은 채 너털웃음들을 짓는다. 입항을 서둘렀기에 여유가 있었다. 갈무리를 다한 뒤, 김선장의 부인이 준비한 저녁만찬 자리에 모두 앉았다. 아내와 딸아이의 환호성이 있었고, 이번에 역시 꽝을 친 엄사장의 한숨소리도 있었다. 김, 멸치, 전복, 소라, 숭어, 광어, 농어, 삼치등 해산물은 싫어하는 게 별로 없는 울 딸래미-어설픈 젓가락질에 마냥 바쁘기만 하다. 김선장, 엄사장, 딸래미와 아내,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명은 첫잔의 건배를 시작으로 제각기 술과 음료수로 마지막 날을 위해 마시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헤어져 언제 또다시 이 곳에서 만날 수 있을련지, 넉넉한 살림살이가 아니기에 우리들은 출조의 끝자리가 마냥 아쉽기만 했다. 우리가 아니더라도 세상은 역시나 굴러가던대로 돌아가겠지만, 그 쳇바퀴에서 낙오되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중년의 육신을 더 괴롭힌다. 엄사장과 나의 술버릇은 꺽기에서 차이점이 있다. 건배를 하면 절대 잘라먹는 법이 없었다. 서너살이 많은 난 그래도 건강을 생각해 이젠 술을 분할해서 마시는데-옆에서 꼬집는 집사람의 바가지도 작용했지만, 엄사장은 맨날 원샷이다. 성격만큼이나 시원해서 좋다. 엄사장의 술잔속에는 유년과 현실이 교차하여 여전히 아픔으로 산재해 있다. 옛날과의 웃음 색깔이 약간 바뀌었지만, 고기를 잡든 못 잡든 섬에서의 여유로운 분위기를 엄사장은 분명 즐기는 것 같았다. 이념도 혁명도 파벌도 없는 낚시꾼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현실만 있다. 구수하게 구운 참돔 볼살 한 점에 한 잔, 튀김에 또 한잔, 속을 메우기 위해 매운탕으로 또 한잔. 세상이 우릴 술 마시게 하고, 이 아름다운 행복이 우리의 술을 깨우게 한다. 살고 또 살아도 욕망과 불행은 끝이 없지만, 다시 살아도 세상의 아름다움은 여전하네 그려! 맥주 한 병으로 가득한 쇠주의 독을 풀고서 밤의 끝자락을 놓으며 엄사장과 나는 기어이 헤어졌다. 언제나 섬은 그 곳에서 숨 죽이며 떠 있겠지. 상처입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안개같은 형체를 가지고 가슴을 저미어 주겠지. 아이의 설익은 푸념들을 모두 감싸안으며 꿋꿋한 엄마의 품으로 내일 그 자리에 또 있을 것이다, 섬은...... ! 그러면, 나는 육지로 와서 몇 날 며칠 몸살을 앓고 후유증같은 비늘을 털어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