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4일. 때 마침 불어오는 바람때문에 섬에 낚시꾼들을 싣고 들어가는 어선은 새벽부터 나루에 목을 매고서 움직이지 못한다. 어제 늦은 오후, 다른 방향에서 미리 입도한 엄사장-그 즐기는 참이슬도 제대로 한 잔 못한 채 오늘의 대판 승부에 맞추어 체력을 보충해 두었는데 ...... .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엄사장은 제때 시간 내기가 무척 어려운 것인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한동안 조용하던 바다가 하필 출발하는 이 시점에서 요동을 치니 참으로 난감하다. 하지만 우린 옛날에도 그랬듯이 4일 전부터 그리움이 있는 그 섬에 무작정 떠나기로 약속을 잡았던 것이다. 세상과 바다는 언제나 원하는 방향으로 한번 나아가 주질 않고, 술 먹은 뒷날 배앓이처럼 그렇게 중년의 두 남자를 슬프게 한다.

여행은,
다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다. 굳어버린 나를 버리기 위해 터를 허무는 몸부림이다. 나약해지기 위해 사람들은 언제나 떠나왔던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이불을 덮는데, 무턱대고 그 이불속에서 몽롱한 꿈을 꾼다. 하지만 저 깊숙한 유전의 원인 모를 신호가 떠남을 부추긴다. 그래서 낚시여행은 무엇을 얻고, 또 잡기위해 출발하는 게 아님이다.
3월 말에 보았던 완도의 하얀 벚꽃은 온데 간데 없고, 앙상한 가지의 마지막 꽃잎은 하늘로 간들거리고 있다. 그래도 꽃은 슬픔이기 이전에 탄생의 축복이겠지. 파랑섬의 지금 쯤은 아마 길목마다 노오란 유채화가 지천에 깔렸을 것이다. 안가봐도 미리 눈에 선하여 죽겠다. 도선을 타기위해 서둘러 도착한 완도항은 집집마다 굴뚝에 연기가 피어 오르는 듯 옛 추억의 어느 아침처럼 고즈늑함이 묻어있다. 내리려는 사람, 떠나려는 사람 아침안개로 젖어 평일의 한산함처럼 모두 말을 잊고 있다. 급하게 배에 짐을 옮기고 나서는 내가 떠나는 것인지 섬이 나에게 오는 것인지 잠시 생각을 버린다.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내 어린 딸 녀석은 난생 처음 타 보는 객선의 쾅쾅거리는 엔진소리에 지 엄마 품을 벗어 나지도 못하고서는, 겁난 얼굴로 세상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다. 그렇게 우리 가족 세 사람은 저 먼 남도에 있는, 깨끗하고도 그 누구가 알지 못하는 파랑섬으로 갔다.

세상은 참 눈물 흘릴 일이 많은데, 언제부턴가 나의 눈엔 물기가 마르더라. 감동해 보지를 못했던가, 힘든 슬픔에 완전히 무너져 보지 못하였던가? 나이 들어 감각이 무디어 졌는지 자꾸 무덤덤해져서 큰일이다. 아마 뇌가 기쁨과 슬픔의 오감적 반사를 스스로의 축적된 노하우로 건조하게 만드는가 보다. 인간의 자기방어 시스템인가? 그렇게 내게 절망을 주었던 내 유일한 딸아이의 아픈 시절이 있었다. 수많은 일들 중에서 처음이자 다른 형태의 슬픔으로 건너온, 나에게서는 전대미문의 일이 되어버린 여식의 병으로 인해 인생의 축을 달리 설정하는 사연이 있었는데, 그 축의 재설정에 바로 딸과 함께하는 여행이 끼어있다.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의 세계속에 갖혀버린 아이에게 생생한 세상의 동영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데, 그 것 밖에 해 줄 수 없는 내가 때론 슬픔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고립된 시각에서 교류를 시작하는데, 문학에서 작가의 새로운 인식이나 매스컴의 인물다큐에서 만나는 철학이 좁은 눈의 나를 신비롭게 한다. 그 무한한 세상의 신비를 장차 미래에 태어날 나의 2세와 한껏 공유하고 싶었는데, 세상은 이 것마저도 술 먹은 뒷날의 배앓이처럼 나를 절망의 시소에 태웠다. 하나를 얻으려면 무조건 하나를 잃게 하려는 것이 신들의 약속인가 보다.

파랑섬에 가면,
그 기엔 감방처럼 갇혀 있는 김선장이란 사람이 산다. 나보다 두 살 쯤 적다. 아무리 가꾸어도 도대체 도시티가 안나는, 금방 보고 또 봐도 늘 해적같은 김선장이 그 곳 파랑섬에서 기거를 한다. 겉으론 말술처럼 보이지만 수십 번 권주를 해도 받지 않는, 마당쇠가 찰떡을 팰 때 쓰는 떡판처럼 말과 행동이 우직한 좀 특별한 바닷가 사람이 있다. 섬은 물이 귀하기에, 아니면 뱃사람은 늘 그래 왔기에 철수 후 민박집으로 와서도 제대로 한번 씻는 걸 못 보았다. 하긴, 해수를 담수화 시킨 물과 받아 모은 빗물로 나체를 닦아 봤자 섬물 그 특유의 뻑뻑한 느낌 때문에 찜찜함이 참 오래 가더라. 차라리 일주일을 참다가 뜨끈뜨끈한 육지의 사우나탕에서 끝내주게 밀어보는 것이 백번 낫겠지. “오랜 만이요”란 말에 “왔시요”, “좀, 잡힙니까”란 말에 “나가봐야 지요”. 참, 내! 세상에 쓸만한 단어가 김선장에게는 별로 없는가 보다. 어찌보면 그 말속에 세월의 고루한 향기가 남아 도는 것 같기도 하고, 모질게 닦아온 개인의 단단한 철학이 박혀있는 것 같기도 해서 언제부턴가 김선장 그 특유의 말투가 대마초같이 귀에 익어 버렸다. 어느 간밤에, 섬속에서의 피곤한 잠에서 쓰디 쓴 레몬처럼 깨어볼 때면 늦은 밤 김선장의 방에서 흘러 나오는 포크 기타소리. 그 건 외로움의 함성인데, 단절된 섬생활에서 오는 꿈의 절규였던가? 혼자 가만히 밤을 장벽으로 두고 기타반주에서 그의 외로운 내면을 컨닝해 본 적이 있다. ‘섬이 싫어서 못 살 것 같으면 떠나면 되지’하고 사람들은 남의 일을 쉽게 말하기도 한다. 수학에는 방정식이란 게 있지만 어디 인생에 그 것이 들어 맞던가? 김선장인들 왜 섬을 떠나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거머리처럼 징하게 소금기가 몸에 배어 버려 도시에서는 도저히 시들어 살지 못하겠는 걸. 그래서 파랑섬에 가보면 그 곳엔 죽지않기 위해 오직 섬에만 살아야하는 김선장이 있다. 주의보만 내리면 늘상 다방에 앉아 담배만 죽이는 파랑섬의 토박이 김선장.
소금바람을 옷으로 털고 내린 파랑섬에서는 부푯대에 매달린 깃발을 시작으로 무당 굿판이 벌어졌다. 꽂아놓은 모든 물질들은 오로지 춤사위로 난장판이다. 해풍은 산기슭을 휘몰아 저마다 오렌지색 지붕의 창문들을 꼭꼭 잠궈 놓게 했다. 도착한 사람이 바라보는 항구엔 담벼락 골목마다 바람만 앉아 있다. 낚시꾼 여행객은 이 쯤이면 치가 떨리기도 하고 새록새록 절망같은 자기학대를 시작하기도 한다. 샛날만 지면 이 지겨운 섬을 사람들은 왜 도망치는 것인가? 떠나는 객선의 나룻터엔 짐을 맨 섬사람들의 행열이 피난민처럼 저린 오금을 매만지고 있다. 둘레둘레에서 넥타이를 맨 사람, 버선발로 뛰쳐 나온 사람, 풀이 죽은 낚시꾼, 아이를 보내는 눈물 어린 엄마가 객선의 쿵쾅대는 엔진소리에 긴 기다림으로 닳아 빠진 시간을 꿰미에 끼우고 있다. 녹슨 뱃고동을 울리며 객선이 떠난 후, 김선장과 엄사장이 차를 몰고는 마중 나왔다. 파랑섬에서는 자동차중 새차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김선장의 봉고차도 벌써 페인트속에 녹들이 침범하여 난리부루스다. 시동을 걸어보면 ‘끼륵끼륵 부루루룽 털털털 털털털’거리는데, 어제 신차를 뽑아 놓으면 내일은 헌 차로 변하는게 파랑섬의 실정이다. 그 만큼 해풍이 사람을 비롯 무쇠마저도 녹여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랑섬 주민들은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하여 절대 새로 뽑은 차를 섬으로 가져오지 않는다. 악수를 해도 언제나 내가 먼저 청하였는데, 요번에도 역시 김선장은 마찬가지다. “오랜만이네요”하는데, “오느라 고생 많았지유”하고는 그 게 끝이다. 니기미, 좀 살가운 맛이 없나? 하지만, 그 모습이 김선장의 매력인 걸 어찌하겠나.
대신 엄사장의 따뜻한 응접을 받으며 힘들게 나를 따라온 여러 짐을 끝내 민박집에다 풀어 놓게 되었다. 그리고는 김유신의 애마처럼 이내 술집으로 타는 목을 축이러 나갔다. 바람과 파도가 섬을 꽁꽁 묶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내일도 출항이 가능할지 의문은 꼬리를 물며 골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입안에 가득 배인 섬바람을 헹구기 위해 정오가 갓 지난 시간부터 엄사장과 난 섬소주를 마셨다. 술은 아무나 육지에서 마시면 안 된다. 그러면 신의 노여움을 받아 싸움을 하게 되고, 결국 정신이 망하게 되어 파탄에 이른다고 했다. 술의 창조적 비밀은 바다에 있다. 하지만, 그 걸 아무도 모른다. 또한 나도 아직 모른다. 그러나,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섬에 오면 술이 달고 시간이 무척 가프게 흐른다. ‘나는 내 말을 하고 바다는 제 말을 하고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한다’고 이생진님도 말하였다. 아픔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섬으로 간다. 섬으로 가야 목구녕에 그 독한 술이 술술 넘어가기 때문이다. 눈동자에서 슬픔이 농하게 익지 않으면 술잔에 쏟아진 물은 목젖에 걸리어 이내 켁켁 소리를 내기도 하고, 함유된 맛중에 쓴맛의 깊은 단맛을 놓치며 그냥 식도의 컴컴한 구멍으로 떨어져 버릴 것이다. 엄사장에게도 숨기고 싶은 뼈저린 고통이 있었다. 아마 2년전의 일인 것 같은데, 엄사장은 이 사건을 절대 되새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송두리 채 무너져 버리게 할 뻔한 사연이었는데,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르겠더라. 그 한 길의 수심에 조류와 수온이 그렇게도 변화무상한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사기칠려고 작정하며 덤비는 넘에겐 방법이 없다. 인간에겐 ‘정‘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게 아주 비논리적인데다 허약한 약점 투성이다. 우리는 그 것에 목숨을 걸려고 하는데, 사기꾼은 이 약점을 이용하기에 공격이 시작됐을 때는 이미 손 쓸 틈이 없다. 1년 반정도의 시차을 두고 엄사장과 난 어리숙하게도 똑같은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 것도 자산의 대부분을, 한푼도 틀리지 않는 똑같이 거금을 말이다. ’내 코가 석자‘지만, 그래도 엄사장과 난 동변상련의 심정으로 서로를 위로했다. 거미줄같이 칙칙한 세상에서 허우적대기도 하고, 자기학대에 불면의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잠든 가족의 얼굴을 보며 가장으로서의 죄책감을 악착같이 느껴보기도 하였다. 그래서 살 맛을 잃으면 술맛이 찾아든다고 했을까? 그렇게 때론 술의 존재론적 당위성이 있기에 엄사장과 나의 건배는 죽이 딱 맞을 수 밖에 없었다. 괴로움을 안고 섬으로 가는 건 그 걸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여행에서 무엇을 얻으려면 시작부터 잘못이 크다. 단지 섬에서 만큼은 풀어졌던 마음의 지퍼를 올리고, 추운 몸을 스스로 덮어준다면 그 걸로 족할 것이다. 파랑섬으로 엄사장과 같이 온 이유가 바로 그 것이지 싶다. 복수를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빨리 마음의 생채기를 아물게 하려는 엄사장의 몸부림을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파랑섬의 밤은 두 중년들이 뿜어 내는 세상의 소리에 저물어 가고, 시침은 속도를 내며 시나브로 천정에 매달려지게 되었다. 아내의 길마중을 맛보며 나는 한없이 시린 파랑섬의 밤길로 나왔다.
제대로 술을 먹게되면 새벽에 일찍 잠이 달아나는 법이다. 엄사장과의 술자리가 몇 시까지 이어졌는지 희미한 기억을 감아올리면서, 술잔에 지문이 달아난 손가락으로 핸드폰의 시간을 열어 보았다. 침침한 눈에 4시를 넘어가는 LCD숫자판이 들어온다. 술 탓에 속이 탄다. 배탈나는 섬물을 치우고 작은 PET병에 담긴 생수를 원샷으로 꺽었다. 지금도 술을 깨는 아침만 되면 ‘이젠 절대 안 마신다’고 다짐을 하지만, 주당들은 자기와의 약속을 일년에 365번하고도 더하는 꼴이다. 그 때 쯤인가, 엄사장이 문밖에서 나를 부른다. “하선장님 날씨 죽입니다, 출조 준비 하시죠?” 어, 날씨가 갑자기 왜 좋아졌지? 몇 년전부터 파랑섬에서만 연속 꽝을 치던 엄사장이 장난을 하는 건가? 옆에서 곤히 자는 아이와 아이 엄마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몸만 밖으로 나와서 민박집 앞의 잠이 덜 깬 바다를 만져 보았다. 정말이다. 거짓말같이 물결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손맛으로 목이 타는 엄사장은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나 앞바다를 둘러 보았던 것이다. 술기가 약간 남아 있는 나의 얼굴과 팔다리는 이 황홀한 속보에 점점 떨려오기도 하고, 어디 몸둘바를 모를 지경이 되었다. 급하게도 둘은 아직 새벽 잠을 자고 있는 김선장과 도시락을 준비해 줄 김선장의 부인을 깨우게 되었다. 근 1년동안 육지에서 닦고 조이고 기름치던 장비가 이젠 윤기가 너무 흘러 제풀에 무너질 판인데, 결국 오늘 그 손풀이를 하며 바다에 소금기를 적실 수 있을 것 같다. 연거푸 하품을 하는 김선장을 뒤에서 밀며 새벽 대물참돔을 잡기위해 파랑섬의 항구로 나섰다. 대물과의 조우, 수개월을 기다려온 꿈의 축제! 여명을 머금은 수평선으로 혼미한 기억을 날려버리고 황급히 낚시선에 오르게 되었다.
(2부는 조만간 올릴께요.)-(술 땜에 글 쓸 시간이 없어서 말입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