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며<?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나는 군사 정권의 말기에 특수교육을 전공한 후, 1989년 졸업 후 서울에 소재하고 있는 지적 장애 교육기관에 부임하였다.
수많은 직업 중 하필 사회적 소외 계층인 장애인 교육에 몸담게 된 것은 나름대로 직업관과 교육관이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나 자신만이 아닌 타인에게도 지극하게 봉사를 할 수 있어 ‘보람’이라는 소득을 하나 더 얻을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싶었다.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가 장애인 교육에 종사를 해야 한다면 그 일을 내가 기꺼이 해 나갈 것이다.’라는 나름대로의 사명감을 가지고 특수교육과를 선택하였다.
대학에서 지적 장애인 특성에 대하여 공부를 충분하게 하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였건만, 자기 관리가 어려워 용모가 단정치 못하고, 교육적 효과를 제때 확인 할 수 없는 정신적으로 미분화 되어 있는 지적 장애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는 건 쉽지 않았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하며 심리적, 육체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하는 일이 잦았다.
지적장애 교육기관에 부임을 하여 3년 차가 되던 1991년 5월 말경 국립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xml:namespace prefix = st2 ns = "urn:schemas:contacts" />현충원으로 현장학습을 가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국가’란 무엇이며 ‘애국’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지적장애 학생들의 교육은 교실 내의 칠판을 이용한 강의식 이론 교육보다는 현장 체험 학습이 교육적으로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 여러 학자들의 보고서에서도 검증 된 바 있기에, 인솔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아이들이지만 현장 학습을 자주 가곤 하였다.
문제는 현장 학습을 가고자 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컴퓨터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는 현장학습을 가고자 하면 담당자가 일일이 해당 기관에 협조 공문을 수문으로 작성하고, 학교 내에서 결재를 얻은 후 다시 타자로 작성하였다. 게다가 일반 편지 송부 방식을 이용하여 현장학습의 실행 여부를 타진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 하여야만 했다. 그러기에 현장 학습 담당자는 협조 공문을 발송치 않아도 현장학습을 실시함에 별 어려움이 없는 기관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 현장 학습 당당 교사의 생각으로는 국립 현충원이라면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별 어려움 없이 참배 할 수 있는 곳이라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그 당시(군사 정권 시절) 우리 교사들의 판단은 안이한 것이었고, 현장에서 여지없이 입장을 거절당하였다.
중학부 학생 3학급이 학교버스까지 이용하여 귀중한 시간을 내어 찾아간 국립 현충원에 사전 통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입장 거절을 당하여 돌아서기에는 사전 교육과 열정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위병에게 양해를 구하고, 해당 상급자를 만나 통사정을 하고 신원을 확인한 후에야 겨우 입장을 할 수 있었다.
그 때 국립 현충원 정문에서 우리들의 입장을 제지하던 위병은 “국립 현충원에 단순한 입장(入場)과 참배(參拜)의 의미는 다른 것이며, 국립 현충원까지 왔다면 순국선열들의 혼이 담겨 있는 충혼탑에 참배를 하는 것이 가장 큰 의미가 있고 보람 있는 일”일 것이라고 설명 해 주었다. 또한 “충혼탑의 참배(參拜)야 말로 사전 예약을 하여 참가를 할 수 있는 일인데, 이왕 윗사람에게 부탁한 것 한 번 더 부탁 하여 참배를 꼭 하고 가라”고 배려하는 듯이 귀띔을 해 주었다.
유명 정치인들이 몸담아 오던 당을 탈당하고 새로운 당을 만들거나 신분의 변화를 모색할 때면 어김없이 지지자들과 함께 참배를 하던 모습의 TV장면을 생각하며 위병이 시키는 대로 또 다시 사무실을 찾아가 부탁을 하니 담당자는 난색을 표하였다. 그러나 열변을 토하며 통사정을 하는 모습이 측은해 보였는지 담당자는 예약 상황을 체크한 후 부하 직원인 듯한 안내인을 일행에게 붙여 주고는 어렵사리 참관 허락을 하였다.
여기서도 우리 교사들의 상식적인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는데 ,현충탑 참배는 사전 예약은 물론 반드시 안내인의 인도에 따라 참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역시 국립 현충원은 무엇인가 달랐다. 현충탑을 들어서는 순간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현충탑이 있는 정면 중앙에 우뚝 서 있는 현충탑 양 쪽 방향의 기다란 벽에 조각 그림벽화를 웅장하게 새겨놓았다. 역사적 년도와 기 순서대로 장식해 놓아 선국선열들이 장렬하게 산화하는 모습이 입체적으로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탱크 아래로 포탄을 안고 뛰어 들어 장렬하게 산화 하는 모습, 일제의 총칼 앞에 굴하지 않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만세”라고 구호를 외치며 순국하는 모습을 연상 시키는 듯 한 그림들은 생동감 넘치고 웅혼하였다. 벽화를 보는 순간 당시의 총ㆍ포탄 터지는 소리와 비명과 절규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였다.
그런데 엄숙하고 슬프고 경건한 자세로 참배해야 할 장소에서 군인들과 탱크, 총ㆍ포탄의 조각 벽화를 마주한 순간, 우리 아이들은 평소 접하기 힘든 볼거리를 놓칠세라 놀라움과 기쁨을 적나라하게 표출시키고 말았다.
“ 와! 멋있다.”
“따다다당, 탕탕탕. 펑,,,꽝! 어, 억!”
순식간에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안내인의 표정에는 당혹감과 난처함이 역력했고, 지도교사들은 아이들을 제지 하면서 현충탑을 참배하는 취지에 걸맞은 행동으로 유도하고자 최선을 다하였다.
“자! 학생들 우리 조용히 기도해요.”
기독교 사학 재단이어서 일주일에 한 시간씩 신앙 시간을 운영해 왔던 것이 큰 효과를 보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의 뜻밖의 난동(?)은 지도교사들의 기민한 노력 덕분에 금세 수그러들었고, 그 사이 우리들은 충혼탑 제단 상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안내인은 순국선열들을 위한 묵념을 하겠으니 학생 대표를 한 명 뽑아 제단 중앙에 있는 향불에 향을 뿌려 달라고 주문을 하였다. 비교적 똘똘한 아이 한 명을 선정하여 간단한 현장 교육 후 향을 뿌리니 안내인은 그 때에 맞추어 엄숙하고 경건하며 힘차고 뚜렷한 목소리로 “순국선열을 위하여 일동 묵념!” 하고 소리를 쳤다.
그 순간 장내에는 군대에서의 취침 신호 같은 트럼펫 음악이 맑고 고요히 흘러 나왔다.
“빵~빠바~~빠라 빠바~ 빵빠바바~~”
아이들에게 ‘묵념’이라는 의미 지도는 하였지만 음악 소리가 끝날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경건한 자세로 취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 까지는 미처 지도하지 못한 탓에 묵념 도중 아이들은 눈을 뜨고, 아직도 여운이 남아 있는 총포와 탱크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곤란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자, 학생들 기도해요. 아직 기도가 끝나지 않았어요.”
해프닝을 겪으며 참배 행사가 끝난 후 구경거리가 있는 곳에서 너무 빨리 돌아간다는 아이들의 원망어린 눈총을 받으며 총총히 충혼탑을 빠져 나올 즈음, 국립 현충원 안내인이 내 옷소매를 조용히 잡았다. “저, 선생님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아이들 과자나 좀 사 주세요.” 하며 오천 원을 내밀었다.
순간 만감이 교차하였지만 주는 사람의 순수한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싶어 “우리 아이들을 생각 해 주시는 마음 정말 감사합니다. 주신 소중한 돈으로 간식을 사서 아이들에게 고귀한 뜻을 잘 전달하겠습니다.”라고 답하며 돈을 받았다.
그는 용기를 얻어서인지 대답하기 곤란하고 민망한 질문을 "툭" 던졌다.
“저 선생님,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장애인 학교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선생님들은 어떤 분들인지요? 정상인들 인가요?”
나는 순간 안내인의 눈동자에서 호기심 가득 찬 모습이지만 부분적, 단정적인 진지함을 발견하고 짧은 순간의 고민 끝에 이렇게 말해 주었다.
“선생님도 다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장애인에 더 가까운 분들이랍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을 보이며 그가 말하였다.
“아! 역시 그랬군요. 부디 희망을 잃지 말고 용기를 내어 열심히 사십시오!”
어느 정도 확신에 찬 안내인의 질문에 대하여 실망을 주지 않으려고 정확한 답변은 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나 자신을 항상 예비 장애인이라 여기고 있었기에 지금도 그 때의 답변을 후회하지 않는다.
또, 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땐 장애인 학생이나 지도교사나 구분 없이 다른 세계에서 온 외계인처럼 비추어져 지도교사들마저 비 정상인으로 보였다면 ‘내가 제대로 교육을 하고 있는 교사가 맞구나!’ 하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고자 한다면 아이들의 관점에서 본 사고 방식을 이해하고, 동화될 수 있는 눈높이에 맞춘 교육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특수교사가 장애인 교육에 뛰어든 그 순간부터 장애인 학생과 지도교사는 한 배를 탄 인생의 동지들이기에 그의 단정적 관점을 고쳐주려고 “나는 장애 학생들과 다른 비장애인이요”라고 해명(?)한다는 것은 나를 믿고 따라준 아이들에 대한 배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장애인들에 대한 무지한 편견을 가지게 되었을까?’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 학교 교육의 부재를 보여주는 일례라는 생각을 한다.
그나마 요즈음 다행인 것은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에서 특수교육 개론 한 과목 정도는 필수 과목으로 선정하여 이수하고 있기에, 장애인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아직도 부족한 것은 초, 중등 학생들의 정규 교과서에 정식으로 장애인들과 관련된 과목을 선정하여 지도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적이 없다. 나 또한 초, 중등학교 시절 학교 교육을 통하여 장애인들에 대한 지도를 받아 본 일이 거의 없고, 더욱이 교과서에서는 그런 내용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쩌면 국립 현충원 안내인이 우리 일행들을 그렇게 본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비장애인으로서의 삶을 평생 유지하고 살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그렇지 않소, 나는 평생을 비장애인으로 살 것이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너나없이 ‘예비 장애인’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선진국은 얼마나 잘 사느냐에 무게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을 받고 살 수 있는 ‘인간 존중에 입각한 인간 자체의 존엄성’에 더 비중을 두고 있으며, 선진국일수록 장애인의 숫자는 후진국보다 현저하게 많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나 학교를 많이 짓는 것보다 더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장애인도 이세상의 한 주체로서 그 인격체를 존중 받는 세상이 되었을 때, 사람이 사람다운 가치를 지니는 것이며, 흔히 말하는 “더불어 사는 세상”의 말뜻을 온전히 실현시키는 것이 될 것이라 믿는다.
어느 특정 지역에 장애인 시설이나 학교 하나를 세우려 하면 혐오 시설로 간주하여 집값이 떨어진다는 등의 지역 이기주의에 부딪쳐 그 뜻을 온전하게 성사시키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 장애인 역사 발전의 참담한 현실이고,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누가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나고 싶었을까?’
‘누가 중도에 무서운 질병이나 불의의 사고로 장애인이 되고 싶을까?’
어쩌면 우리 자신도 언젠가 장애인이 될지도 모르는,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일진대, 남의 일로만 생각하여 함부로 소홀하게 장애인을 대할 수 있을까.
내가 이제껏 겸허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유이다.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비굴함과 오만이 아닌 당당함으로 살기 위해, 인간 존중의 삶을 실현하고 진정한 행복을 느끼며 살기 위해, 나를 낮추고 타인도 나처럼 소중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믿으며 우리 이웃의 장애인들과 가족처럼, 친구처럼 따뜻하게 손잡고 함께 살아 갈 세상을 꿈꾼다. 함께했던 우리 아이들의 맑고 고운 눈동자가 또렷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