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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촌별곡(池村別曲)

8 2,404 2005.03.15 19:08

속초에는 순이가 살고있다.
내 마음에 아직 남아있는 가을의 향기는, 그녀때문에 바삭한 참나무잎에 물이 오르기도 하고 눈이 덮히기도 하다가, 비포장 신작로의 외줄로 찍힌 발자국에 그만 그리움이 된다. 그 자국은 간이역으로 가는 길이었다.
<선생님을 사랑할 뻔 했습니다...>
유행가 가사로만 읊어도 어눌하기만 했던 우리 촌부들의 가슴에 대책없는 들물의 박자를 짚게했던 그해 가을, 순이의 편지속의 그 단어는 내게 너울로 덮쳐 왔다. 아직 한 번도 써본 적도 없고 들은 일도 없었던 그 아름다운 단어로 그녀는 또박한 글씨로 이별의 발자국을 만들었다.
통틀어 한 명뿐인 간이역의 키작은 역장은 조개탄을 갈며 말했다.
"늦었제, 막찬기라."
그 글씨에 소복소복 눈이 덮혔다.
붕달이 성님은 속초로 가면 오지 말라 했다.

소리못 감밭에는 빌라가 들어섰다. 어마어마한 돈보따리를 챙긴 붕달이 성님은 옳은 낚싯대 하나 챙기지도 못한 채 지난해 세상을 놓았다. 퉁퉁 부은 차군이 종이컵 소주를 연거퍼 붓더니, 소리못 약붕어가 병이 드니 사람도 따라 시들었다는 것이다. 호상에 이름 석 자를 넣으며 기껏 인연이 종잇장같아 '정들지 말자, 정붙이지 말자'며 소리못 뒷산에 상여곡으로 쉰 목을 뽑았다.

농사일에 허리휘니 기집새끼 둘 째이네
어허와 어허와 어화넘차 어허와
일장춘몽 세상살이 대문밖이 저승일세
어어허 어허와 어화넘차 어허와

붕어낚아 배채우니 호구지책 걱정없고
어허와 어허와 어화넘차 어허와
이자리에 쉬어가니 세상만사 꽃이 지네
어어허 어허와 어화넘차 어허와

소리못 어귀에 이르니 목이 메었다.
붕달이 성님은 순이의 가슴을 토실한 붕어라 했다. 그 기막힌 표현을 어떻게 외설에다 비교할까! 있는대로 보고 본대로 느낀 은밀한 자유를 그는 바람의 속성처럼 거부하지 않았다. 허기지면 먹고 아프면 앓았다. 무서우면 소리치고 불쌍하면 도와주고, 나쁘면 욕하고 좋으면 울다가도 웃었다. 나의 이중적 표정관리는 그에게는 같잖은 호기로 보여 늘 핀잔의 빌미였다.
"낚은 붕어가 순이 가슴처럼 뜨시면 세 발 수심을 골라야 여덟 치가 나오능기라, 등신아!"
그러나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순이의 가슴처럼 소리못의 여덟 치는 내게 현기증으로만 남아있다. 두 마리의 손맛이 가을의 전설이 된 그해 추숫날, 순이는 소리못에 이는 물비늘 바람처럼 나를 흔들었고, 미닫이 문풍지처럼 동짓달 내내 떨게 했다. 그녀가 내게 구사하려 했던 그 아름다운 단어의 형체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일상의 진지함이 내게도 있었을까, 아니면 그녀가 즐겼던 산수유차 향처럼 내게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우직함의 한 부분 뿐인 것을 신뢰로 포장한 것일까.
나는 사람을 싫어했다. 셋만 모이면 자존심을 자긍심으로 승격시키는 다툼의 영역에 속절없이 공범이 됨을 후회했다. 그러나 보편적 사회성은 그 타당이란 미명아래 이합과 집산을 반복하며 나를 지치게 했다. 떠나야지, 가야지, 탈출해야지, 도망가야지 하며 허구로 둘러쌓인 인맥을 벗어나려 했다. 그 난공의 요새에 백기를 드니 '붕달이 성님'이 빙그레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올 줄 알았다, 똑똑한 등신아, 이제부터 붕어를 낚는다. 배고프니 낚는다. 양기에도 그만인기라!"
그러나 타성에 젖은 몹쓸 버릇을 그에게 들킬 때마다 그는 웃기만 했다.
"성님, 순이가 외로워 보이능 게 매력인기라요. "
"..."
"손가락도 길고 피부도 희고...하얀 목덜미 아래 드러난 쇠골에서 이어지는 어깨선이 저고리를 살리고요, 말기에 눌린 소복한 가슴이 할 말을 참으며 숨을 죽이는데, 치마폭에 쌓인 가는 허리를 적당한 엉덩이가 받쳐주니 안정감이 있지요. 심성도 참 고불끼라요."
"..."
솔직한 아름다움을 여유있게 늘리고 줄여주는 한복의 맵씨에 순이는 유연한 몸짓 언어도 구사할 줄 알았다.
"그라머 만나야제."
"뒷일을 우째 감당하라고..."
"그라머 말아야제."
상두꾼은 순이가 앉았던 소리못 들길을 지났다.
세월은 때로 그렇게 느닷없게 해후를 맛보이는 맞바람으로 왔다가 가차없이 가로질러 산맥을 넘는 돌개바람이 되기도 하는 걸 이런저런 이유로 모른 체로 넘겨갔다.
'구슬꿰듯 제법 모양을 갖추면 남은 시간이 별로 없더라. 넘어가는기라.'
날만 새면 회한이니, 나는 늘 구슬이 뒤바뀌었다. 아집과 물적 권위로, 때론 나르시즘으로 무장한 허구의 아성으로 배수진을 치고 기다렸다. 무엇을 기다렸는가! 인생의 절반을 재(財)와 물(物)에 건네주고 나머지의 절반을 가권(家權)에 걸고 또 그 절반을 자타의의 공사권(公私權)의 명예에 주고나니 자투리뿐이었다. 책읽을 시간도 모자라는 변방의 모퉁이에 실로 목자의 구도(求道)로 나타난 붕달이 성님!
그는 우산을 개조한 파라솔 아래에서 산죽(山竹)대를 걸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서면 진실에 근접한다. 그의 옆에 있으면 초자연이 펼쳐진다. 산나무도 들풀도 산새랑 개미도 그와는 쉬어간다.
그런데 세월을 털고 가버렸다.
그의 자리에 잠시 산수유향을 피우고 간 순이도 실은 그의 영역이었는데 감히 나의 사연으로 전용(轉用)했다. 모두가 가버렸지만...
마른 눈물이 시리다.
차군만 알게 명정아래에 두 칸 낚싯대를 놓았다.
막걸리를 뿌리고 소리못 뒷산을 돌아 나왔다.
소쩍새 둥지에 솔가지가 걸렸다. 생명은 그렇게 바짝 움을 트며 또 다른 소우주가 열리는데, 그가 앉았던 소리못 호박자리에도 파란 풀이 돋아났다.
그는 바람의 색깔을 입고 있었다.
'두칸 반 대를 놓을 일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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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댓글
이면수 05-03-16 00:15
안녕하세요
갑자기 자리를 비우셨기에 간간이 인사`생각만으로 기다렸습니다
두칸반대의 끝에서 보여지는 세상을 보셨는지요 ..
시간이 않나셨었는가 봅니다 ..
아직의 여유로 속초`가 멀으셨나봅니다 ..
한번 다녀가시지요 ..

간만에 뛰워주신 글이라 이해할 재주는 없어도 무지무지
반갑고요 전처럼 자주자주 뵙기를 기다립니다 ^^
허거참 05-03-16 15:47
소리못 감밭은 빌라로 시들어 자연을 넘어 살던 붕달 성의 명줄마저 놓게했던가요.. 고요한 가슴에 물비늘처럼 파문을 일으키던 실피드의 순이는 산수유향만 남기고 갔는가요.. 호박자리에 두칸반을 놓으면 지난 세월의 자취라도 건질 것을..!^^
경주월드님..오랜만입니다..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뭉클하군요..^^
속초 사시는 이면수님이 부러워지면서..
경주월드 05-03-17 09:28
따뜻한 이면수님의 댓글 너무 감사합니다.
꾸밈이 없는 '솔직한 멋'을 님께 배웁니다.
인정도 많고, 배려도 잘 하시고...휴머니티의 寶庫^^
속 깊은 표현이랑, 믿음직한 인상도
저 마음에 늘 담아놓고 있습니다.

여긴 비가 오는데, 속초는 역시 춘설이겠지요.
경주월드 05-03-17 09:51
우직한 정감이 전매특허였던 붕달이 성님같은 허거참님,
덜 떨어진 저의 가치관에, 보들레르의 심미안을 엿보게 해주신 님께 고마움을 느낍니다.
님이 계셔서, 개개인 의식과 인낚이 더불어 업 그레이드 됩니다.
때론 철학적 빈곤에 단비를 주시고,
위트와 유머의 진수도 보여주시니 살맛납니다.^^
섬원주민 05-03-17 11:07
붕달이 성님이 살아있을 때 낚시를 했던 그 자리에
상여가 지나가고 순이가 앉아있는 장면이 오버랩됩니다.

다시 뵙게되어 기쁩니다.
깜바구 05-03-17 11:38
월드형님,오랜만입니다.
전화로라도 자주 안부 여쭈었어야 했는데~
다시 뵙게되니 반갑고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경주에서 봄붕어 낚시 모임을 갖을 예정이라고
이 번 거제도 모임에서 몇몇분께 말씀드렸는데,
언제쯤 시간이 나시는지요.
날짜만 정해 주시면 4학년들은 제가 책임지고 소집토록 하겠습니다^^*
섬갑장도 얼굴 함 보자꾸나.
참, 오곡도는 언제 가는데,
울 할망구가 책에 사진을 보더니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네ㅋㅋㅋ
경주월드 05-03-17 19:00
수 년동안 섬과 섬을 다니면서, 예사롭지 않는 기록을 집필한 '이순신이 싸운 바다'는 아마 명저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님같은 분을 알고 있으니 한없이 자랑스럽네...)

***

중석 아우님^^
물어물어 찾아준 그날을 잊지 않고 있네.
사업장을 인수할 분이 연기를 청하는 바람에 어수선하기에...
정리후에 모임을 주선했으면 하는데, 부디 동의해 주시게.

(그런데 바다 싸이트에서 민물 미팅을 주선해도 괜찮을려나...)

칼있어 마 05-04-11 13:51
감동적인 글이군요. 경주월드님의 언어에 무차별 성폭행과 강간을(서방 죽은지 10년 된 과부같은 기분에서의) 당하고 빠져나갑니다. 프로작가 수준이시군요. 좋은 글 많이 올려주시와요! 어복충만 맨날행복!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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