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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절

9 1,440 2004.09.08 01:56
석중씨는 오 년전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었다.
공원묘지를 차마 돌아서질 못하고 소줏병을 생수 마시듯 비우던 그날도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빗물에 꺼진 타다 남은 옷고름 조각을 줏어 들고는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이형, 이게 신혼여행 때 입었던 옷고름입니다."
슬픈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에 빗물이 눈물이 되어 흘렀다.
그리고는 하염없이 만지작 만지작거렸다.
나의 메마른 위로가 도움은 커녕 그를 더욱 아프게 한 것 같았다.
"세상과 세월이 잊게 만들 겁니다요."
'세상에, 무슨 그따위 위로가 다 있남! 반 백 년이나 살고서도 기껏 한다는 상문 인사가 그 모양이니...'
상가에 들면 망인에 재배하고 상주에 절하고는 멀뚱하게 앉아있기가 일쑤였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인사를 해본 적이 없었다. 조우들은 앵무새처럼 잘도 해대던데.
"평소에 찾아 뵙지 못해 망인께 송구합니다." 혹은 "악천후에 상사가 걱정입니다." 또 어떤 녀석은 부자상가에서 아부성으로 "상주의 극진한 효성에 영면하실 겁니다." 또는 망인이 일흔도 안 되었는데도 "망구를 넘어 효성이 자자합니다."라는 둥, 벼라별 상문안을 하는데도 나는 항시 더듬거리는 별무인사였다.
이러하니, 그날도 세상과 세월이 어쩌니 하며 석중씨를 괴롭힌 게 자명한지라 멀뚱하게 타다 만 옷고름만 내려다 보았다.
'옷고름이 무슨 대수일까! 빨리 철수하고 뜨뜻한 대중탕에 들어앉아 월척자리 좌향이나 잡아야지...'
"이형, 아내와는 십오 년을 같이 살았습니다. 아내는 이 옷을 첫날 밤에 입었다며 고이고이 간직했지요. 해마다 딱 한 번 입고는 세탁하여 간수하였는데 내일이 바로 그 결혼기념일입니다."
그러면서 반지낀 손가락을 꼭 잡았다.
"아, 그렇습니까! 며칠만 더 계셨더라면..."
'아이쿠, 또 실수를! 며칠 더 살고 죽으란 말처럼 들렸을까, 설마...도데체 상가에만 오면 이모양이니 이젠 정말로 입 다물어야지. 왜 나는 심각한 남의 일에 순응치 못할까! 이제부턴 감동을 해봐야지!'
장의차가 출발을 서둘렀다.
한줄기 가을비가 석중씨의 상복을 흠뻑 적셔버렸다. 추워 보였다. 빗물에 젖은 초췌한 얼굴을 본 회색머리의 한 상문손님이 이렇게 위로했다.
"안타깝습니다. 젊다면 젊은 나이인데, 요절처럼 보내시니 얼마나 슬프시겠습니까, 그래도 눈물을 거두심이 망인께서도 원하는 바 아니겠습니까. 슬픔을 인내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자식들이 보니 쉬 안도가 됩니다. 용기 잃지 마십시오."
아, 얼마나 멋진 말인가! 이 상황에 저보다 더한 위로가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왜 저런 표현을 못할까!
석중씨는 울먹이는 콧소리로 감사의 답례를 했다. 찬비를 맞아 목소리는 코감기가 들어 있었다. 가만히 있을 걸...장의차 손잡이에 걸린 두루말이 화장지를 냅다 풀어 쥐고서는 상주 코앞으로 내밀었다.
"코 푸십시오."
회색머리가 나를 쳐다 봤다.
'니미, 보긴 뭘 보노! 나도 속맘은 너랑 같은데 말로 안 되니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제, 지금 상주에게 화장지보다 더 급한 게 어딨노!'
누가 뭐랬나! 제풀에 주눅이 들어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회색머리도 따라 담배를 물더니 왠일인지 내게 썰렁한 부탁을 했다.
"저, 실례지만 성냥있는지요?"
"아, 예예, 성냥은 없고 젖은 라이타는 있는데요..."
'에이구, 이 요상한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을 하누!' 하는데, 웬걸, 상가손님들의 한기진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돌았다.
뱉어 놓고서도 좀처럼 수습이 안되는 좌충우돌식의 대퉁스러움 때문이리라.
"라이타 돌이 젖었네요. 불이 안 튑니다요. 낚시터에서 줏은 거라서..."
'에휴, 누가 물었나! 그 끝말은 안 해도 될 걸...'

그렇게 장례식을 끝낸 지가 오 년이 흘렀는데, 그간의 숱한 상문도 유사한 지경으로, 좀처럼 상가에서 감동적 문안을 할 재주가 없었다.
석중씨와는 낚시벗이 되어있었다.
가을 소류지에서 그가 말했다.
"나는 이형의 그런 모습이 참 좋습니다."
"예?"
"가식이 없는 진솔한 하나의 표현이 말로 포장한 백 번의 인사보다 좋습니다."
"예?"
"제게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그 어눌한 진실의 소리를 요."
"허허, 그 참!"
우리는 모처럼 작은 못이 떠나갈 듯 웃었다.
그리고 그는 요즘 재혼을 고려중이라 했고 상대는 역시 남편을 암으로 잃은 과부라 했는데, 그녀를 만난 후부터는 결혼반지를 빼서 포켓에 넣는다고 했다. 그게 예의일 것 같다며 내게 자문을 구했다.
"잘 하셨습니다. 독신이 여간 힘드실테데..."
"아니, 반지 말인데요. 그걸 빼니 너무 허전합니다."
"아, 예..."
또 돈키호테가 될까봐서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찬찬히 잘 생각해보겠습니다."

말만 하면 '노신'의 '아큐'가 확실한지라. 편지를 썼다. 몇 번을 고쳐 쓰고는 고히 접어 석중씨의 자택으로 우송을 했다.
혼수준비로 몸과 마음이 바쁜 그인지라 답장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결혼식을 기다렸다. 아니 손꼽아 기다렸다.
마치 원도 출조 전날밤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니 내가 장가드남! 그런데 가능할까, 또 더듬거리면 어쩌누...'

예식손님은 친지와 친구만으로 간단하게 초청을 했다는데도 꽉 찼다. 모처럼 정장을 하고 가슴에 꽃도 하나 챙겨 달았다.
왜냐하면 내가 사회자이기 때문이다.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결혼식 사회를 그날 맡은 것이었다. 열 번도 더 연습을 했었다.
'오늘로서 돈키호테와 아큐! 니들 잘 들어라! 작별을 고한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
마이크를 통한 헛기침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지금부터 김석중씨와 조인자씨의 두 번째 결혼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먼저 주례선생을 소개하겠습니다. 지역유지로서 남들이 마다하는 3D 업종인 고물상으로 때돈을 번 김용달씨를 모십니다. 환영의 큰 박수를 주십시오!"
갑자기 하객들의 폭소가 터졌다. 혹시 내 지퍼가 열렸나하고 아래를 내려다 봤으나 온전했다. 앞자리의 안면있는 하객이 말했다.
"밤무대 가수가 오남?"
"신랑, 신부 입장! 아니 구랑, 구부께서 입장하시니 가차없는 박수를 때려 주세요!"
주례가 작은 소리로 제동을 걸었다.
"이 사람아, 신랑 입장후 신부를 불러야지 같이 들어오면 어떻하누?"
"가만 계셔요, 아, 그렇게 했던 결혼식이 파토가 나서 요렇게 두 번이나 합니다요. 오늘은 특별한 예식이니...특별히 진행합니다요."
석중씨가 신부를 안고 입장하니 드레스 들러리가 게걸음으로 따라붙었다.
하객들이 모두 세찬 박수를 쳤다.
주례의 얼굴이 풀어졌다. 신이난 하객들은 사회자의 다음 이벤트를 설레이듯 기대하는데, 세상에, 신랑은 그렇다치더라도 신부가 저렇게 웃다니 별일이네!
"다음은 맞절이 있겠습니다. 차렷, 좌우향 우, 경례, 바로, 좌우향 우, 하객들에게 경례! 뒤로 돌아!"
대충 방향이 맞을 것 같았는데, 어쩐 셈인지 신랑은 사회자인 나를 보고있었고 신부는 창밖을 보고있었다.
"허허, 이사람아, 그건 내 담당인데..."
불만있으면 바꾸자고 할 참이었지만 연습한 게 아까워 그냥 넘어갔다.
'운수 좋은 줄 아슈!'
"다음은 이 지역의 덕망이 지대하신 김용달 주례님께서 가슴 뭉클한 주례사를 하시겠습니다."
그제사 싱글벙글하며 나의 사회를 만회하듯 장황한 주례사가 밑도 끝도없이 이어졌다. 고물상 성공의 자서전을 읽는 중이었다.
'참자. 지금부터는 진지해야 한다.'
"다음은 예물 교환이 있겠습니다. 오늘 혼례를 치루는 이 분들께서는 그 흔한 이혼의 전력이 아닌, 아픈 배상을 경험한 분들입니다. 신랑은 오 년전 사고로 아내를 잃었고 신부는 지병으로 남편을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야만 했습니다."
일순간 장내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돌아가신 분들도 진정 이 분들을 사랑하셨길래 오늘의 성혼을 하늘나라에서 축복해주실 걸로 사회자는 믿습니다. 저와는 낚시벗인 신랑이 낚싯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처가 해준 반지를 모질게 빼자니 겨우 가라앉은 상처가 도집니다. 아마 신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 일을 어찌 할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 이 식장에 하늘나라 그분들께서 선물을 보내 오셨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예물을 교환하겠습니다. 전부인이 해주신 반지와 전남편이 해주신 반지입니다."
약속이나 한듯 하객들이 모두모두 일어섰다.
그리고 기립박수가 멈추질 않았다.
서로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던 신랑, 신부가 하얀 장갑으로 자꾸만 반지를 닦았다.
그 다음은 어떻게 끝냈는 지를 기억이 안 났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치며 말했다.
"감동적입니다. 최고의 결혼식입니다."
그때의 그 회색머리가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내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말했다.
"실례지만 성냥있는지요."
창밖을 보니 돈키호테와 아큐가 손수건을 흔들며 동, 서로 떠나고 있었다.
오늘은 불이 켜졌다.
"낚싯터에서 줏은 겁니다."

***(2004. 9. 7/경주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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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댓글
생크릴 04-09-08 09:34
월드님의 글은 항상 생각이 많이 나고

세상사의 진득한 그 무엇이 있어서 너 무 좋습니다.

좋은날 아침 좋은글 감사합니다.
경주월드 04-09-09 12:06
민물 낚시로 새우 뜨러 갔었습니다.

뻘물이 져, 새우가 기질 않으니 통발에 미꾸라지만 담겼네요. 가실에 논둑아래 한 삽 뜨면 탐스런 미꾸라지를 주전자에 담던 게 어제같은데, 이제 전설이 되었군요.
그래도 빠꾸마지와 버들치는 아직 건재합디다.
버들치 껍질을 벗겨(아가미 옆) 깻잎에다 된장에 고추를 얹어 한 뽈때기 삼키고는, 탁배기 한 추바리...
그 맛! 아실 겁니다.^^
시원소주 04-09-09 18:15
정말 재밋게 읽었습니다 ^^ 감동
생크릴 04-09-09 19:25
캬!! 탁배기...한사바리 라 안하고 추바리라 하는군요...
저녁밥 먹으며 한 추바리 해야지...
이면수 04-09-10 16:26
인낚에세이 코너를 이제서 처음 접해봅니다 ..
안녕하십니까
처음 읽어내려갈땐 찡 ~ 하더니만
나중엔 소설처럼 환해지면서 마무리 접네요 ..
석중씨" 라는분 가차이 지내는분이신가 보네요 ..
각자 모르고들 살아오셨지만
이제는 만나셨으니 새로이 잘사시는게 중요하겠지요 ..
..........
괜히 .. 쓸대없이 편치못하는 감정이 드는건 뭘까요 ...
석중님과 15년을 사랑하며 살아오셨고
첫날밤에 입으셨다며 그 ` 사랑의 물건을 고이고이
간직하시며 ...
착하셨고 . 사랑 하시는것밖에 모르셨던 .. 먼저가신분의 생각에 ...
뭔가가 ... ?
여운이 쬐금 남는글입니다 .. ( 제 생각에요 )

여기 속초 . 비가 올라는지 설악산쪽으로 검고 무거워보이는
구름들로 꽉. 찼습니다
잘보고 나갑니다 .. 구 ` 벅 .
경주월드 04-09-14 16:31
나락들을 보니 푸근해집니다.
해마다 찾아들지만, 논들에 서기만하면 가장 진솔한 가치를 봅니다. 농사는 거짓이 없지요. 드넓은 들나락이 비바람과 태풍을 넘어 촌부의 마음을 꽉 채울라치면, 늘상 그렇듯이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여나므 마지기 다 팔아봤자지만, 그 수확의 작은 돈을 감히 어디다 비교할까요. 폭풍우에 조마조마 했던- 작지만 또 다른 심사를 감히 어디다 비교할까요.

그 혼신의 색깔! 진실의 소리가 들립니다.
이삭이 영글며 비비는 소리를요...



草公先生 04-09-15 15:24
너무 오랜만에 들여다 본 코너에서
느닷없이 경주월드님의 글을 접하고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어 봅니다.

항상 좋은 글.
심금을 울리고 웃기는,
소설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주옥같은 풍성한 삶.
늘 감사드립니다.

인낚에는 모두가 뛰어난 소설가 들만 오시는가?
하는 의구심도 가져 봅니다.

인낚을 찾으시는 모든 분들
항상 건강하시길..
두원사랑 04-09-15 19:06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에 안부 여쭈어 봅니다.
^*^..

좋은글~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삶을 사는데 있어서, 수많은 고비 고비가
많이 있지요..

가슴이 아픈일도 많이 생기기도 하구요.
오늘 "곡절이라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제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군요..

많은 부분을 공감을 느낀답니다.
경주월드님~~..
잘생긴 얼굴에 카리스마도 넘쳐나던데요.
^*^..

보기에 참 좋았더랬습니다.
그럼...
경주월드 04-09-15 20:11
초공님을 상상하면 수초가 한창인 민물못이 생각힙니다.
'만돌이 마누라와 아주까리...'와 '족제비...'를 초밭에서 구상했거던요.
많은 민물 소제를 챙기신 것 같아서^^
경주에 자주 오신다는 댓글을 본 것 같습니다. 별이 밤못에 뜨는 초밭 소류지를 알고 있습니다.^^

두원님의 글이 뚝 끊긴 지가 꽤 되었네요.
오프에서 지나칠 때 망설인 적이 있습니다. 바다와 더불어 열심히 노력하는 부부의 일상의 아름다움을 보았지요.

세상의 부부 모두가 알고보면 '곡절'의 사연을 가진 채, 때론 그걸 묻으며 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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