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이 싸운바다, 한산대첩의 현장

신상품 소개


회원 랭킹


공지사항


NaverBand
점주/선장 > 실시간 조황
b_hot_activegloat_200x80.gif b_hot_nios_200x80.gif

 

 

 

이순신이 싸운바다, 한산대첩의 현장

7 3,753 2004.09.15 17:46
< 한산대첩과 제승당>


"어허 여기는 이 장군 순신의 제승당(制勝堂) 터다.
바로 그가 이 집에 앉아 지휘하고 호령할 제
천지 귀신도 그 정성을 굽어보고 바람 구름 번개 비가
그의 응변 술책을 도와 왜적들이 바다에 깔려 날뛰면서도

이 집 밖에서만 웅성거리지 차마 감히
가까이 다가들지는 못했던 것이다.
어찌 그리 장하시고 이제 수 백년이 지나

주춧돌은 옮겨지고 우물과 부엌마저 메워졌건만
아득한 파도 너머 우거진 송백 속에 어부와 초동들은
아직도 손가락으로 제승당 옛터를 가리켜주니...."

제승당 유허비를 노산 이은상이 국역하고 고동주가 글을 썼다.
이 글은 제승당 유허비와 함께 장군을 모신 영당인 충무사 입구에 있다.

2004년 6월 6일 통영 여객선 터미널 건너편 골목에 있는
복국집에서 광도면 생막걸리 한 잔으로 해장을 한 후
아침 9시에 한산도 제승당으로 출발하는 배표를 끊었다.

차를 싣고 갈 수 있는 카페리에는 나이든 단체 관광객들과
젊은 연인들 그리고 한산도의 망산(해발 293m)을 오르려는
등산객들이 다수 보였다. 현충일이라 아이들과 함께 제승당을
참배하기 위해 가는 가족들도 눈에 띈다.

배는 통영 내만을 빠져나가 마리나리조트를 뒤로하고
한산도를 향해 달린다. 미륵도와 한산도 사이의 바다로 나가
견내량 쪽으로 바라보니 지척에 철탑이 하나 우뚝 선 방화도가 보인다.

날씨가 좋아서 멀리 견내량의 거제대교도
신기루처럼 아스라이 걸려있다. 아! 이 바다가 바로
한산대첩이 있었던 곳이구나! 머릿속의 시계는 순간
거꾸로 400여 년을 돌아 나는 한 명의 조선수군이 되어
달리는 배의 갑판에서 상념에 잠기고 말았다.

1592년 8월 13일 건너편 미륵도에 있는 산양읍 삼덕리의
당포에서 물자를 보충하고 전열을 가다듬은 이순신 함대는
이 고장의 민초였던 김천손으로부터 견내량에 적선 7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다음날인 8월 14일 아침
이곳 한산도 앞바다로 진출했다.

카페리호는 아침 9시 30분에
방화도와 대섬 사이를 지나고 있으니
이순신 장군도 거의 비슷한 시간에 그 날 이 위치에 있었으리라.

그 때 우리 함대는 이미 8월 12일에 노량해역에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군 24척, 이억기의 전라우수영군 25척,
원균의 경상우수영군 7척 등 56척에다 거북선 3척을 합친
연합함대를 편성한 상태였다.

연합함대가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견내량에서
방화도 쪽으로 왜적 대선 1척과 중선 1척이
척후선으로 나와 있다가 우리 함대를 정찰하고는
견내량 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 때 견내량에는 목동 김천손이 알려준 내용과 거의 일치하는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총 73척의 왜선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여기서 이 날 견내량에 집결한 일본군의 전력을 분석해보자.
우선 함선을 보면 대선인 아다케(安宅船)가 36척이다.
아다케는 전장이 약 20미터 정도 되는 주력 전투함으로
배의 앞부분인 이물에 대포용 총구가 하나 있고 나머지는 조총용 총구가 나 있다.

조총병 약 30명을 포함해서 전투원이 약 60명 정도 승선하며,
노 하나에 1명씩 노 젓는 수부가 80명 정도 된다.
주력 무기는 조총이며 3교대에 의한 연속사격방식으로
사격을 하며 유효사거리는 50미터 정도였다.

그리고 그 날 24척이 동원된 중선인 세키부네(關船)는
노젓는 수부가 약 40명이며 조총병 20명을 포함하여
약 30명의 전투요원이 승선하는 배로 대포는 탑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소선 13척은 고바야(小早)로 작은 관선이라 불리며
노 20개에 20명의 수부가 매달리고 조총병 8명을 포함하여
약 10명의 전투원이 승선하는 배다.

한편 조선 연합함대의 전력은 거북선 3척과 판옥선 56척이었다.
판옥선은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함이다.
판옥선은 다층전투함으로 비전투요원과 전투요원을 분리 배치한 배다.

즉 노를 젓는 격군(格軍), 키를 잡는 타공(舵工),
돛의 줄을 조정하는 요수, 배 바닥에 고인 물을 퍼내는 무상(無上) 등
비전투요원은 전투요원인 활을 쏘는 사부(射夫),
포를 쏘는 포수(砲手)와 화포장(火砲匠) 등 전투요원과
분리시켜 배치하여 전투효율을 높였다.

즉 격군 등 비전투요원을 판옥내에 숨기고
전투원은 상장 위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상장 위의 넓은 갑판은 대포를 설치하기에도 좋으며
높은 곳에서 쏘기 때문에 사정거리도 늘릴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하 수사급 지휘관이 탑승한 판옥선은
배의 밑바닥 길이가 약 20미터에 탑승인원 160명,
노 16자루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타 수군장이 탑승한 판옥선은 전장 16미터 정도에 탑승인원 125명,
노 12-14자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판옥선은 배의 밑바닥이 평평하여 제자리 회전이 가능하다.
이 기능을 적극 활용한다면, 좌현의 포를 발포할 때 우현은 장전을 하고,
발포가 끝나면 배를 회전시킬 수 있다.

이 시간에 발포를 마친 좌현은 장전을 하고,
장전이 끝난 우현이 적에게 향하면 다시 발포할 수 있다.

판옥선에 비교할 수 있는 왜군 전함 아다케는
선박 건조기술의 차이로 인하여 대포를 줄로 매달아야
쏠 수 있을 정도로 진동에 쉽게 깨지는 배였다.

배를 건조할 때 사용하는 나무의 재질도
조선수군이 사용한 적송이
일본 수군의 삼나무나 전나무보다 견고한 것이었으며,
철제 못을 사용하지 않고 배를 짜 맞추는 기술도
조선수군이 한 수 앞서 있었다.

당시 왜군은칼을 들고 상대방 배 위로 기어올라 접전을 벌이는
단병접전을 주로하고 있었다. 각개 병사는 칼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의 장기는 접근전을 벌려 해적처럼
상대편 배에 기어올라 육박전을 펴는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이었다.

이런 전술은 해적들이 주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16세기 유럽은 물론 전 세계 어디에서나 가장 흔한 전법이었다.

그러나 이순신 함대의 전법은 주로 함포를 사용하여
원거리에서 적을 격파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적이 우리 배에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한산해전이 있던 그 날, 이순신 장군이 판단하기에
견내량은 지형이 좁아 물살이 세고 암초가 많아
우리의 주력함선인 판옥선(板屋船)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배끼리 부딪히면 적의 등선육박전술에 말려들 우려가 있었다.

또한 아군의 장기인 포격전을 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만약 형세가 불리해지면 적은 뭍으로 도망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장군은 왜놈들을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내어 일거에 전멸시키기로 작전을 짰다.
한산도는 거제와 통영(당시는 고성) 사이에 위치하여
사방으로 헤엄쳐 도망가기가 어렵고 혹시
섬에 패잔병들이 상륙하더라도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먼저 이순신 연합함대의 판옥선 5~6척이 왜적의
척후선을 추격하여 공격하는 척하다가 물러 나오자
왜적들은 일제히 돛을 올리고 한산도 앞바다까지 따라 나왔다.

여기서 우리는 주변 지형을 다시 한번 잘 살펴보면서
상상의 날개를 펼쳐볼 필요가 있다.
73척의 대 선단이 불과 5~6척의 판옥선은
쉽게 섬멸할 것으로 생각하고 전 속력으로 추격했으리라 판단된다.

그 때 나머지 50여 척의 우리 함선은 어디에 있었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순간 내 눈에는 한산도와 견내량 사이에 있는
방화도와 화도가 들어온다.

우리 함대는 이 섬들 뒤에 숨어 있다가 왜 선단이 접근해 오자
일시에 나타나 학익진으로 포위한 것이 아닐까...

적의 선봉이 포위망 깊숙이 걸려들자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 함포가 일제히 불을 뿜고
수없는 화살이 적선을 향해 날아갔다. 집중포화로 왜적
선봉 주력선 2~3척이 순식간에 불에 휩싸이고

꼬리를 물고 뒤따르던 적선들은 반격은 하면서도
기세가 꺾여 퇴각하려 하였으나 좌충우돌 혼란만 더욱 가중되어 갔다.

이에 사기 충천한 우리 수군은 앞다투어 맹공격을 가하여
총 59척을 격파 또는 나포하여 왜군의 주력함대를 일시에 궤멸시켜버렸던 것이다.

후미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갑옷에 화살을 맞은 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전선 14척을 이끌고
견내량을 빠져나가 괭이바다를 지나 김해로 도망쳤다.

전투 중 바다에 떨어져 익사한 왜적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나마 살아남은 패잔병
약 400여 명은 형세가 궁해지자 한산도로 올라갔다.

그 날 한산도 일대에서는 거의 하루 종일 전투가 있었다.
날이 저물자 이순신 장군은 궁한 적은 쫓지 않는다는 병법에 따라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견내량 한 쪽 바다에서 밤을 새웠다.
이 것이 저 유명한 한산대첩이다.

진주성전투, 행주산성전투와 함께 임진왜란 3대첩에 들어가는
한산대첩의 역사적 의의는 실로 크다.
개전 초기 해안 포구에서 국지전으로 치루어 졌던
그 동안의 전투와 달리 한산해전은
넓은 바다에서 정면으로 맞붙은 한판 승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함으로 인하여
왜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으로의 진출이 좌절되고
병참선을 위협받아 북진이 어렵게 되었다.
아군은 후방의 군량을 확보하고 보급로를 지켜
전국을 수복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내가 탄 뉴파라다이스호는 해갑도(解甲島)와
거북등대를 지나 한산만으로 미끄러져 들어서고 있었다.
해갑도는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에서 이긴 후
이섬에 올라 갑옷을 벗고 땀을 씻었다는 섬이다.

그리고 거북등대는 물밑의 암초인 수중여 위에 설치한 등대로
이 곳에서 왜선이 암초에 걸려 많이 난파했다는 곳이다.

통영에서 제승당 까지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지만
이날 선상에서 나는 한산대첩과 안골포해전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다.
선착장에 내리니 한산면 사무소까지 가는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지만
나는 걸어서 반대방향의 제승당으로 향했다.

매표소를 지나 굽이굽이 돌아 들어가는 해안은
물이 유리알처럼 투명하여 뛰어들어 헤엄치고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수려한 경치도 좋지만 전략적 관점에서 바라본 한산만은
조선시대의 목선 전함이 기항하는 해군기지(Naval Base)로는
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형을 살펴보니 아무리 거센 태풍이 와도
전혀 피해가 없을 북향의 익곡만이다.
제승당으로 향하는 길가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2003년에 몰아친 살인적인 태풍 매미에도 아무런 피해 없이 남아 있다.

이 근처 대부분 섬에서 자라던 소나무들이
절반 이상 부러져버린 것과 비교하면 기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병사들이 진주하기 위해서는 물이 있어야 하는데
제승당 입구에는 장군이 1340일 동안 머물면서
군사들과 함께 사용했다는 우물이 깨끗이 단장되어 있었다.

바다와 불과 15미터 거리인데도 짠맛이 전혀 없고
40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물맛 그대로 전하고 있다.
더운 날씨에 물을 한 바가지 퍼마시니 생기가 돈다.

계단을 타고 조금 올라가니 제승당, 수루, 충무사, 한산정이 나온다.
운주당으로 불렸던 제승당은 한산만의 요충에 위치한
현대의 해군 작전사령관실과 같은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1593년 8월 11일부터
1597년 4월 12일 한양으로 붙잡혀가기 까지 진영을 여기에 설치하였다.

총 1,491일 분의 난중일기 중 1,029일의 일기가
여기에서 쓰여졌고 많은 시도 남겼던 곳이다.
현재의 제승당은 충무공이 가신 뒤 폐허가 되었다가
1739년 통제사 조경이 중건한 것을 1976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제승당 건물의 네 개 기둥 현판에는 장군이 지은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이라는 시가 걸려있다.

수국추광모 水國秋光暮수국에 가을빛이 저무니
경한안진고 驚寒雁陣高추위에 놀란 기러기떼 높이 나는구나
우심전전야 憂心輾轉夜걱정에 잠못이뤄 뒤척이는 밤
잔월조궁도 殘月照弓刀기우는 달이 활과 칼을 비추네

어설프게 번역은 해보지만 나라 걱정에
잠을 못 이루시던 장군의 우국충정을 오늘 내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제승당 오른쪽에는 한산만을 내려다보는
수루(戍樓)가 있고 큰 북이 하나 걸려있다.
수루에는 신발을 벗고 일반인의 출입을 허락한다.
한산만의 아름다운 경치를 담기에는 이곳이 최고다.

왼쪽 산 위에 한산대첩비가 있고
원색의 집들이 있는 문어포 마을이 보인다.

거북등대가 있는 바다 오른쪽 산은 망을 보다가
적이 나타나면 고동을 불던 고동산이다.
수루 아래 우거진 대나무와 아열대 식물들을
한산만의 풍경과 함께 담으면 멋진 풍경화가 된다.

오늘 홀로 수루 난간에 걸터앉으니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歌)는 남의 애를 끊나니"하고
노래한 장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0

좋은 글이라고 생각되시면 "추천(좋아요)"을 눌러주세요!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 네이버로 보내기
  • 텀블러로 보내기
  • 핀터레스트로 보내기
7 댓글
구름도사 04-09-16 07:13
안녕하세요......
청포도가 아주 먹음직스럽게 보입니다.....
참님의 글을 읽다보니..하루쯤 낚시대없이 여유롭게 한산도를 한번 거닐고싶은........
오래전 어릴적에 가본 한산도의 수루가 기억에 가물가물합니다....ㅎ
전 글재주도 없고 아는것도 없어서 좋은글 올려주시는분들이 항상 존경스럽읍니다..ㅎ
틈틈히 좋은글 자주 올려주시길부탁드립니다......

소봉대가자낚시 04-09-16 08:32
섬원주민님...
안녕하세요.^^*..!!

"청포도" 향기가 막~스며 나오는듯 ....
오늘 아침...
큰 칼 옆에차고......이순신 장군님을 그려 봅니다.(초등학교때...교정의 동상~)

늘....건강하시고 행운이 가득 하십시요.
생크릴 04-09-16 08:57
엊저녁에 읽으려 했는데 컴이 전반적 으로다가 왕창

느려 터져서 이제야 읽었습니다.

마치 400전의 현장에서 느끼는 실화처럼

너무 실감나서 400년이 순식간 왔다갔다 하는군요...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운이 깃드시길 빌어마지 않습니다.
草公先生 04-09-16 11:13
먼저 섬원주민님께 감사 드립니다.
섬원님의 아이디만 봐도 고향생각이 나길래...

밑에 1부는 어제 읽어 보았으나 댓글 달 용기마저 나지 않더이다.
님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접근에 의한 현실감 넘치는 정보를
아스라한 예전의 얄팍한 지식에 접목시켜 보면서
해박한 님의 지식에 다시한번 머리가 수그러짐은 당연한 귀결이겠죠.

오곡도의 섬원주민님 아지트엔 가보지 못했지만
벌써 몇번이나 다녀온 듯한 느낌마져 듭니다.
능선위에서 바라다 보는 한려수도.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림같은 섬. 섬....
섬원주민님 마냥 부럽습니다.

그리고 좋은 글 많은 도음 되었습니다.







아련히 뜨오르는 옛추억의 향수가 오늘따라 더욱 생각 납니다.
남망산,
섬원주민 04-09-16 15:13
여러 님들 과찬의 말씀에 어쩔줄 모르겠습니다.
얄팍한 지식이지만 저가 현장을 발로 뛴 기록입니다.

계속 올릴께요..
경주월드 04-09-17 13:34
제승당엔 네 번을 갔더랬습니다.

매번 노천의 해전도를 보며 아쉬운 점은,
남해 해전도 전체를 Led를 사용하여 제작한다면(거제 포로수용소처럼) 참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3대첩을 비롯하여 당포해전과 1,2차 당항포해전, 안골포해전, 웅포해전,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장악하던 부산포해전까지를...
가덕도 밤낚시나 진해 용현을 돌때 부산이 함락되던 날의 충무공의 고뇌를 감히 어찌 헤
아리겠습니까마는,

급박했던 1592년 음력 4월보름
영남우수사 원균의 통첩은 90여 척의 절영도 왜선 정박,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으로 350여 척의 부산포 진입을 통보받습니다.
다음날 부산이 함락됩니다.
이틀후 동래와 양산, 울산이 함락됩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재해권을 쥐고있는 충무공 이순신의 눈앞에서 왜적의 손에 부산땅이 들어가는 것을...
충무공은 진중일기에서 이렇게 읊습니다.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한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 중략... 적들의 상륙을 막아야하
는데도 무방비다. 철저하게 바다에서 막아야 하는데도..."
왜적이 상륙하면 무고한 백성들이 다친다는 것입니다.
한산대첩의 서막을 알리는 북소리가 이때부터 울립니다.

국보76호인 이충무공전서와 친필초고 난중일기는
이은상님의 번역으로 영인본이 되어있지요.
(님의 답사처럼, 고증이 필요조건인데도
적지않는 번역가들이 번역에만 몰두한 나머지
답사를 생략한 오역 '난중일기'가 한때(70년대) 많이 나돌았습니다.)

섬원주민 04-09-17 14:18
월드 형님 반갑습니다. 충무공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군요.
현장은 꼭 가봐야겠더군요.

이순신 장군은 임란 발발 보름전에 여수의 선소에서 만든 거북선 시험운항에 성공하고
하루 전에는 여수 앞바다에서 거북선을 동원한 기동훈련과 함포사격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앞을 내다본 장수였지요.
 
포토 제목
게시물이 없습니다.
 


인낚 최신글


인낚 최신댓글


온라인 문의 안내


월~금 : 9:00 ~ 18:00
토/일/공휴일 휴무
점심시간 : 12:00 ~ 1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