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초록 묵상에 빠져...
1.
하루 종일 비가 추적주척 내리는 어린이 날,
팬티 차림으로 컴 앞에 앉아 자판 두드리느라 한참을 집중하고 있는데
막둥이가 씨익 웃으며 다가와서 "아빠, 어린이 날인데 선물 안줘요?"하고 말한다.
"아빤 모르겠는데,엄마가 선물 주시겠지."하고 넌지시 떠밀곤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는데
아랫층에서 개 짖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
마당 구석의 정원석에 오렌지색 빨래줄을 목에다 맨,
얼마 전 너무나 귀여운 아기 두 마리를 낳아 내게 생명의 경외감을 안겨주었던 놈.
외모야 그리 품위없는 개지만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주인과 손님을 가려가며 적절하게 짖어대는
집 잘 지키는 꽤 쓸만한 놈이다.
얼핏얼핏 녀석이 짖는다는 생각은 했지만
집중하여 글 쓰느라 그때그때 까먹곤 하다가
한 참 뒤에야 개가 왜 저리 오랫동안 짖어대는 걸까 싶었다.
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시끄러운 걸로 보아 거의 퍼붓는 수준이다.
앙칼진 목소리로 짖어대는 걸로 보아 혹 어디 아픈가, 생각하며 후다닥 1층으로 내려가보았다.
맙소사~!
목에 맨 빨래줄이 온 몸을 칭칭 감고 있다.
제딴에 풀려고 왔다갔다 하다가 마당의 나무도 한 바퀴 감은 채
몸이 거의 고정되어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다.
시간이 꽤 지났던 모양인데 온 몸이 걸레처럼 젖어있고
날 바라보는 표정은 구세주를 만난 듯 애처롭기만 하다.
불쌍한 놈...
그럴듯한 줄 하나 없이 허접한 빨래줄에 목을 매달고 있을만큼
메마르고 가난한 집안에 들어와 이 몹쓸 고생을 하다니...
쏟아지는 비를 흠뻑 맞으며 그렇게 오랫동안 목이 터져라 짖어도
내다보는 사람 아무도 없는 황량한 집에서
그래도 어디서 붙어먹었는지(?) 때가 되니 남들처럼 새끼도 낳고
손님 맞을 줄도 아니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꼬인 줄을 풀어주었더니 기뻐 날뛰듯 물기 털어내느라
좁은 마당을 펄떡거리며 한참 지랄 용천을 한다.
크~얼마나 좋으면 저리 날뛸까!
2.
최근 있었던 재.보궐선거에서 집권여당이 참패를 했다.
탄핵 이후 급격한 대중적 지지를 경험했던 여당이
단 한 곳도 건지지 못한 이번 재.보선 결과는
작금의 무능력한 정치권을 질타하는 민심을 그대로 보는 듯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정치권의 움직임에 혀를 차고 어려워진 경제상황을 한탄하고 있다.
노래처럼 불러왔던 '개혁'이란 게
실 생활에선 어떤 변화를 느끼지 못할만큼 고루하고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게 광범위한 시민대중의 생각이 아닐까 싶다.
장미꽃 향기로 민중의 코를 자극했던 숱한 정치적 이슈와 정책은
실제 서민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아침저녁으로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참으로 왜소하기만 하고 절차와 행정중심으로만 짜여진 '그들만의 개혁'인 것 같아
알게 모르게 브로커만 살찌우는 기형적인 국가경영책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한다.
장사꾼이든 월급쟁이든 갈수록 극명해지는 경제적인 불평등을 실감하며
박탈감과 분노를 키워가고 있는 게 현실인데
정치판은 입만 열면 여전히 개혁 운운하고 있다.
붉은 띠를 이마에 동여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시위에는
암울한 80년대의 분노가 여전히 남아 있고
쇠파이프를 들고 거리에 선 건설노동자들의 모습엔
"참고 지켜보니 다를 게 하나도 없더라"는
처절한 자기성찰과 사회적 저항이 그대로 녹아있다.
거리를 가득 메웠던 함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그간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정치권에 대한 지독한 불신이
이번 재.보선 결과에 농축되어 있는 게 아닐까.
목 졸려 짖어대는 개에게 줄을 풀어주니 저리 좋아 날뛰듯
민중의 목을 휘감은 이 끈적거리는 현실을
왜 철저하게 접근하여 행복확대방안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가 말이다.
더욱 광범위해진 빈곤층에 대한 실질 지원책와
사회개혁입법 실천은 과연 요원한 일인가?
3.
자판을 두들기며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아내가 매콤한 미나리무침과 커피를 갖다준다.
효도방학이란 특별한 주제로 집에 온 딸아이는
모처럼 만나는 동생과 함께 조용하던 집안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고
간간이 아내는 아이들과 무슨 얘길 하는지
도란도란 나누는 소리가 집안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모처럼 맛보는 행복감이어서 생경스러운 느낌마저 든다.
지난 한달 간
아내의 지병으로 이 병원, 저 병원을 오가며 마음을 졸여 그런지 몸무게가 몇키로나 빠졌다.
뇌하수체 호르몬 계통에 이상이 있어서
결혼 초부터 병원을 들락거렸지만 이번엔 유난히 통증이 심했다.
살아오며 몇 차례의 신장결석과 심장, 혈압, 부정맥 등으로 병원신세를 졌는데
이제 그 모든 통증의 맥을 알게 된 것 같아 그마나 다행스럽다.
250까지 치솟은 혈압이 도무지 떨어지질 않아
약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통증에 시달렸는데
잠을 이루지 못하고 끙끙 앓는 아내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보내는 하룻밤은 너무 길게 느껴졌다.
아파하는 아내 곁에서도 난 출근을 위해
작은 간이침대에 누워 코를 골며 꿈나라로 빠져들곤 했지만
사람 사는 게 이런 거겠거니 생각하며 열심히 기도하였다.
시티며 엠알아이며 온갖 검사를 다 하는 와중에도
아내는 극심한 두통으로 구토를 계속했고, 결국 실핏줄 몇 개가 터졌다는 소견이 나왔고
늘 미열과 함께 감기 기운에 시달렸던 증세가 바로 악화된 신장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심하면 신장이식수술을 받아야한다는 의사는 내게 돈을 많이 벌어놓았는지 물었다.
수술을 하면 비용이 얼마나 드는 지 되물었더니 6000만원이 든다는데
난 속으로 "6만원이 든다해도 난 수술은 안해!"하고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터진 혈관은 자연스럽게 흡수되고
매일 주사를 맞으며 씻어내는 치료를 계속하였더니 매우 좋아졌다.
통증으로 잠못이루는 아내를 곁에서 지켜보는 것도 여간 힘들지 않았는데
이렇게 아내가 장난끼 가득한 소리로 아이들이랑 만들고 있는 왁자지껄한 소음에
난 얼마나 행복한 지 모른다.
4.
올 해 들어
주 3일 울산을 오가며 행했던 보따리장사를 이젠 일주일 풀로 하게 생겼다.
내용이 워낙 방대하여 벅차긴 했지만 나름대로 집중하여 수행해 왔고
수업프로그램도 이젠 제법 틀을 갖춰가고 있어서 내가 느끼는 보람도 그만큼 크다.
한 가지 분명한 목표를 갖고 매달림으로써
내게 찾아온 시련을 극복하는 데에도 큰 힘을 얻게 되었음은 말 할 것도 없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써야하는 요즘 같아선
허접한 방파제에서의 하룻밤낚시가
그 어떤 난바다에서의 호쾌한 일전보다 내겐 소중하다.
역설 같지만 내가 낚시를 하지 않아도
별 탈없이 살 수 있는 몸과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닥치는 주변의 여러 힘든 일들을 보고 겪으며
때론 속상해 하고 때론 마음 깊이 상처받기도 하지만
아픔과 인내 뒤에 찾아올 자잘한 행복을 예감하며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무척 노력해야 했다.
세상 모든 이치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끌어가는 것일텐데
시대가 험한 탓인지 남에게 상처가 될만한 말들도 생각없이 불쑥불쑥 내뱉거나
겉으로 보이는 사소한 것들에 목숨을 걸고 매달리는 사람이 있다.
말이란 게 한 사람씩 지날 때마다 증폭과 축소를 반복하는 법이지만
사람과 사람이 이루는 관계란 게
말 몇 마디로 그리 쉬 평가될 정도의 가벼운 건 아니다.
때론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무게가 있고
때론 목숨 걸고 지켜주고 보듬어주어야 하는 가치가 있는 법이다.
내 말글살이가 유난히 조심스러운 요즘은
내가 있던 자리에 가만히 있는 연습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부쩍 하게된다.
내 있던 자리를 벗어날 때 사람으로 인해 절망케 되거나
사람으로 인해 극심한 허무에 빠질 수 있음을 배우게 된다.
눈을 돌려 세상을 보면
진심으로 나누고 사랑해도 내 가진 게 모자라 쩔쩔 맬 지경인데
스스로 마음공부가 부족한 탓인지 안절부절할 때가 많다.
언제나 눈과 가슴을 세상의 바닥에 대고있고자 하지만
때론 눈에 콩깎지가 씌였는지 넘보지말아야할 세상을 넘보기도 하고
욕심이 커져 무리하기도 한다.
참 다행인 것은 내가 낚시꾼이어서일까
꾹 참고 기다리니 시련도 견딜만 했고
예감했던 대로 내게 작은 행복감이 불쑥불쑥 나를 찾아온다.
지옥에 떨어져도
나만의 행복은 늘 그 자리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변함없이 내 마음 깊은 곳에 행복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진실로 행복한 것은 내밀한 나만의 것이다.
살며 사랑하며 낚시를 하며
가장 깊이 나를 흔들어대는 행복이
내 안에 충만해 있다니...
전인권...I need you to turn t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