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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구보로

5 1,879 2006.08.18 19:10
이상(李箱)은 1933년 종로1가에 다방 '제비'를 개업하고 백천온천에서 만난 금홍이를 마담으로 앉히고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1934년 구보(仇甫)가 된 스물여섯의 박태원(朴泰遠 1909~1986), 무기력한 도시적 지식인인 구보는 종일 시내를 쏘다니다 친구 이상을 만나러 제비다방으로 간다.
당시 '가산'과 더불어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모더니즘의 거장, 박태원의 권태로운 도시적 일상을 구보가 도맡는다. 그해 이상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삽화를 그려준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그는 등장한다. 유신시대를 최인훈이, 90년대엔 주인석이 광주의 비극을, 시인 오규원의 연작시에 이르기까지 '구보의 활약'은 반세기에 이른다. 세기를 넘어서도 그가 출현할 것이라는 기대감과 더불어 막연한 아나키즘의 그림자를 감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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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은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에 뽑혔으나 적극 나서진 않았다고 한다. 정부수립 후엔 김기림 정지용과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전향성명서까지 냈다. 박태원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외이셔츠 차림으로 '마실'가듯 이태준을 만난다며 집을 나섰는데 그 길로 월북한다. 처와 오남매를 남겨두고서...
1953년 박태원은 권영희(권순옥)와 운명적 재회를 하고 결혼을 하는데 남편을 사별한 그녀는 천재 시인 이상의 연인이기도 했다. 그후 30년간을 병마와 씨름하다 1986년 심질환과 뇌출혈로 격동과 격정과 질곡의 세월을 마감한다. 권영희가 2부부터 병상 구술한 갑오농민전쟁은 일생의 역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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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19일 제14차 이산가족 상봉이 실시된 금강산 온정각휴게소. 북에서 온 박설영(70)씨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기수였던 소설가 구보 박태원(丘甫 朴泰遠·1909~1986)의 장녀로 북한에서 살아온 설영씨는 이날 남한에서 온 여동생 소영(68), 남동생 재영(64)씨 등을 만났다. 설영씨는 이날 만남에서 소영씨의 아들이 유명한 영화감독 봉준호씨라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2003년 ‘살인의 추억’에 이어 최신작 ‘괴물’로 호평을 받고 있는 봉준호 감독은 구보의 외손자가 되는 셈이다.]

자타가 공인한 모던 보이 박태원, 풍속과 세태의 주변인을 대변하는 걸작 '구보'를 탄생시킨 천재 소설가! 이상, 유정, 가산, 정지용등과 더불어 그 시대 한국문단을 주름잡았던 구인회의 별들!
데모테와 갑빠형의 어눌한 페션, 제3자적 관조의 필름 셔터, 때론 이상의 '다다'와 아방가르드를 짐작한 시대를 앞선 모더니스트, 그리고 천변. '애욕', '제비', '염천'의 이상과 하웅의 구보 삽화가 벌리는 당대의 천재들의 행보에 숨을 죽인다.
그러므로 설명이 안 되는 그의 U턴에 당황하다가 '극적인 것은 닿아있다'는 우주론적 관념에 서기도 한다.
우렁찬 쇠스랑의 함성이 내뿜는 혁명의 대열에서 그가 연출하는 민중선봉의 길은 진정 그가 열었을까. 그러나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에 일견을 수용한다면, 사상은 선택인가 운명인가의 기로에 직면함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카프에서 서성거렸고 구인회(모더니즘)에 기여했고 이태준을 따라 38선을 넘었다. 그 길은 원래 있었는가, 그가 만들었는가.
나는 그의 전반부를 살았던 구보이고 싶다.
비록 박태원의 '천변풍경'이 청계천에서 대동강변이 되었을지라도, 시대를 대변하는 '모던 보이'가 맞바람에 서 있을지라도 내게 각인된 그의 몽타주는 30년대의 구보를 진술한다.
이 대동강의 천변도 기실 아득한 애옥살이에 힘 겨우나 잠시 단정한 모습 사이를 비집는 숨은 세상의 단편이 그날 제비다방에서의 이상과 나눈 낮은 목소리에 오버랩 된다.
절대로 말하면 안 될 구보속의 권순옥의 자리는 선택인가, 운명인가.
사상도, 사랑도 사람이 하는 짓인데...
나는 그냥 모더니즘의 거리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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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대동강변에서 찍은 사진으로 왼쪽부터 동생 박문원, 박태원, 처 권영희 (서울=연합뉴스)]
천변풍경은 훌쩍 세월을 넘는다.
나는 구보에게 용서를 구하며 팩션을 각색한다.
이상은 구보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넨 줄 알았다면 정인택에게 그녀를 보내지 말 걸."


***경주월드/2006. 8. 18

[주]
일전에 구보에 관한 서평을 게재했습니다만 사진을 보완하여 재게재합니다.
'잠자던 사진'의 원본을 스케닝한 후 전체와 일부를 카피했습니다. 사진 식별이 가능해졌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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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댓글
가을산 06-08-19 16:51
월간 문예운동의 기획특집 '나의 아버지 구보 박태원' 을 읽고 경주월드님의 글을 읽으면서
구보를 읽으려 하였으나 어렵군요....
그 만큼이나 경주월드님의 내면의 세계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경주월드 06-08-19 23:03
안녕하세요, 가을산님,^^
어려운 것 저도 인정합니다.
처음엔 운명의 연인이었던 권순옥(권영희)의 기막힌 인생역정에 촛점을 두었다가 차츰 구보에게로 옮겨 갔지요.
그러자니 1920년대와 30년대의 문단 사조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말하면, 연대기에서 이념이라는 족쇄로 억지로 잊혀진 문학사의 음지를 진지하게 읽고싶었습니다. 1988년 월(납)북 문인들이 해금될 때부터 작심했지만 워낙 짧은 지식(그 부분이 금기였으니 어쩔 수 없었지요.)이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 지가 고민이더군요. 기껏 일부만 알고있는 KAPF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짓이라 '내 다음에 밥벌이 걱정이 덜하면 꼭 공부하리라'고 다짐했지요.^^

이제 아이들도 하나, 둘 혼사가 이루어지고 겨우 시간이 허락되는 요즘이 제겐 절호의 기회라서 작정을 했습니다. 금기의 서적들이 봇물처럼 출판되었으나 제각각의 추측(어차피 검정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지요.)으로 문헌의 선택이 어렵더군요.
제 벗(국문학과 교수)의 도움으로 선정한 책 14권을 교보 문고를 통해 3회에 걸쳐 구입을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길게 설명을 드리는 이유는 참으로 오랜만에 당시의 '구보일행'을 진지하게 알고싶어 하시는 가을산님이 너무 반가워서 자꾸만 님을 붙드는 실례를 무릅씁니다.)
각설하고,^^
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자타가 공인하는) 진정한 모더니스트 구보의 행보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월북을 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카프의 맹원도 아님), 경향이나 프로 문학보다는 차라리 다다이즘에 친숙한 그가 '천변의 고향'을 버리고 아니 오남매(나중에 고모를 따라 간 장녀까지)와 아내를 남겨두고(사실은 버렸다해도 과언이 아님) 북으로 간다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 아니고서 어떻게 실행을 하겠습니까. 사상의 기반도 취약한, 부르조아의 타성에 길 들여진 구보, 유미주의적 예술파적인 그의 배경은 그야말로 천변의 풍경일진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실가듯 천가방을 메고(구인회 조용만의 표현) 떠났습니다. 제 마음에 남은 '영원한 구보'는 그날 이후로 사라졌습니다. 그가 이태준(구인회 발기인)을 따라 38선을 넘자 실명 박태원의 2막의 무대는 모더니즘의 1막과는 달리 노동자 농민의 사회주의 무대 배경으로 전환됩니다.
어느날 갑자기 두 번째 인생을 살게된 박태원을 두고 혹자는 이태준에 대한 배려의 동기라는 설(구인회의 적극적 추천, 박태원의 친일 성향시 이태준은 절필하고 낙향 후 낚시로 소일)을 제기합니다만 정설은 아닌 듯합니다.
남로당파인 임화도 죽고(사형), 이태준도 숙청, 심지어 평양파인 우직한 한설야도 숙청되나 그는 살아 남아 대작 갑오농민전쟁(3부작)을 아내 권영희(위의 사진)와 완성합니다.
아시다시피 그의 아내 권영희는 권순옥이며 이상의 두 번째 연인이었고, 정인택의 부인이었으며 박태원의 아내였습니다. 기가 막히는 운명의 여인이었지요.

작가 조영복('월북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의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념은 선택의 대상인가, 아니면 격랑치는 역사의 중심에 서있던 운명의 주사위인가'를 두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가을산님,
끝까지 읽어주셨다면 영광입니다. 더 공부하여 모자란 부분을 다음 기회에 게재토록 하겠습니다. 님께서 힘을 실어 주셨으니, 불면의 짧은 여름밤이 넉넉하기만 합니다.^^
가을산 06-08-20 07:28
많은 가르침을 주시기를 기대 하겠습니다

평안 하십시오...^^
거제우연낚시 06-08-21 23:45
몇번을 읽어도 쉬이 댓글을 달지 못했습니다.
우매한 아낙인지라 문학은 아는게 없어서지요.
그저 단순 무식해서 머리 쥐난다는 이유로..ㅡ.ㅡ;;
이제사 돌아보고 가슴친들 무지를 벗어날수 없지요.
더운 여름...
못지않는 님의 열정에 머리 조아립니다.
우연 조금더 여유가 주어지면 문학에 대한 공부를 해보고 싶습니다.
경주월드 06-08-22 20:44
가을산님,
아무튼 동지가 생겨 흐뭇한 마음입니다.^^
혹시 저의 틀린 부분이라든가 중요부분이 누락된 경우를 발견하시면
부디 교정을 청합니다.

우연님,
무지하시다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늘 님의 겸손을 따라가려 애 쓴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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