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이 싸운 바다, 민초들의 승리

신상품 소개


회원 랭킹


공지사항


NaverBand
점주/선장 > 실시간 조황
b_hot_activegloat_200x80.gif b_hot_nios_200x80.gif

 

 

 

이순신이 싸운 바다, 민초들의 승리

4 1,460 2004.09.22 10:52
이순신이 싸운바다
민초들의 승리

임진왜란은 조선이 승리한 전쟁이다. 1592년 5월 23일(이하 날짜는 모두 양력) 일본군 선봉이 부산포에 도착하여 임진왜란 7년전쟁은 시작되었다. 5월 24일에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정발 장군이 전사하였으며, 5월 25일에는 동래성이 함락되고 송상현 부사가 전사했다.

6월 7일에는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결사 항전하던 신립 부대마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에 의해 궤멸되고 만다.이처럼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조선 육군이 고전하고 있을 때 남쪽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합포, 적진포, 사천, 당포, 당항포 등지에서 연전연승하면서, 육지의 적이 병참선을 위협받는 상황이 되었다.

곽재우, 김천일, 고경명, 정문부 등의 의병부대가 각처에서 일어나고 명나라 원군이 도착하자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이 조선의 승리로 끝나게 된 것은 이순신과 같은 위대한 장군의 활약도 중요했지만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민초들의 의병항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육지에서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도 민초들은 이순신을 도와 끈질기게 항쟁하여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경남 통영시 산양읍 영운리 속칭 삼칭이 마을에는 '돛단여' 또는 '괘범도'라 불리는 간출여가 하나 있다. 통영의 마리나리조트에서 산양 일주로를 따라 약 10분 정도 달리면 나오는 영운리에는 일운마을과 이운마을이 있는데 이운마을에서 바닷가로 내려가면 선착장과 포구가 나온다.

여기서 포구 오른쪽 끝의 해안을 끼고 돌아 약 15분 정도 걸어가면 돛단여가 우뚝 서있다. '여'라고 하면 암초를 말하며 물 밑에 있는 것은 수중여이고 물 위로 솟아있는 암초는 간출여라고 한다.

비가 간간이 오락가락하는 초여름 날 필자는 돛단여를 찾아 나섰다. 영운리 바다 건너편 한산도의 문어포가 손에 잡힐 듯 보이길래 카메라를 들이대면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리기를 반복한다. 물이 빠져 파래가 늘린 해안을 따라 걷는데 비가 와서 그런지 아주 미끄러웠다. 노 젓는 배에 작업 인부 서너 명이 타고 지나가면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봤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 오는 날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변 끝 부분에 있는 조그만 암벽을 타고 도니 돛단여는 거기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땀흘리며 찾아온 돛단여 괘범도! 과연 그 위에 돛을 몇 개 달아 놓으면 멀리서 왜군이 보고 우리 수군의 선단으로 착각할 만한 암초였다. 바위 덩어리인 돛단여를 바라보는 순간 말할 수 없이 반가웠던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가 본 것은 단순한 바위만이 아니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쉼 없이 구르고 있지만 민중의 함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이 평범한 바위 덩어리가 내게 일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났을 때 이 고장의 장삼이사들이 창의하여 격문을 돌리고 낫과 괭이 등 농기구를 들고 왜군과 항전했다.

그들 중 일부는 이 괘범도에 올라 돛을 달아 위세를 올리고 군함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을 기만했던 것이다. 내 눈에는 여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여 위에 조선옷을 입고 짚신을 신은 수많은 의병들과 이를 지휘하는 탁연 장군의 모습이 아련히 보이기에 깊은 감회에 젖었다. 이때 탁연 장군의 의병부대는 현재의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뒷산인 장군봉에다 목책을 치고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하며 밤에는 불을 밝혀 수군을 응원했다는 이야기가 이 고장에 전해온다.

그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바다에서 싸우다 왜군이 육지로 도망가자 끝까지 추격하여 이들을 섬멸했다고 한다. 이를 바라보던 이순신 장군이 감탄하여 "그가 왜병을 무찌르는 것은 마치 큰 바람이 풀 위를 휩쓸고 지나가는 것 같다."고 하였다.

탁연 장군이 분전하다가 전사했을 때 "의를 위해 힘을 다하고 충으로 목숨을 바쳤다."면서 애통해 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극진히 장례를 치른 후 당포(산양읍 삼덕리) 만호에게 일러 묘역을 잘 지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한 후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로 복귀하여 몰락한 조선 수군의 남은 배 12척으로 서진해 오는 왜군의 대 선단과 맞서 승리한 것이 저 유명한 명량해전이다. 1597년 10월 26일 이순신함대는 울돌목 좁은 해협에 진을 치고 왜군과 필사의 일전을 벌여 승리했다. 여기서 우리는 잊지 말고 영원히 기억해야할 이름들이 있다.

그 날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을 도와 함께 싸운 이 고장의 민초들이다. 해남의 오극신, 오계적 부자는 호남의 의병으로 여러 싸움에서 늘 큰 공을 세웠는데 명량해전에서 돌과 창으로 왜적과 맞서 싸우다 부자가 한날 한자리에서 전사하니 충무공이 나의 오른팔을 잃었다며 탄식했다 한다.

마하수 일가 5부자의 혈전도 의병항쟁의 표본이다. 부친이 적선에 포위된 이순신을 구하다 적탄에 맞아 전사하자 그 시신을 안고 일성 통곡한 마씨 형제들은 적이 패퇴할 때까지 결사의 항전을 그치지 않았다 한다.

조응량 부자와 양응지 숙질도 의병으로 참전하여 명량해전에서 낫과 곡괭이 등 연장으로 적을 무찌르다가 승리를 눈앞에 두고 전사하니 보는 이 들이 모두 슬퍼하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폐선을 밤낮으로 수리하여 명량해전을 가능케 한 사람들도 있었다. 정충량, 김세호 등과 함께 전쟁준비에 혼신의 힘을 쏟은 무명의 선장과 목수들이었다. 그리고 이 고장 부녀자들까지도 밤이면 언덕에 올라 강강술래를 하면서 수군을 도왔던 것이다. 우수영 기념공원에는 이들의 활동을 기리는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다.

한 마디로 명량해전은 민과 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총력전이었다. 이순신은 1597년 10월 25일 난중일기 끝부분에 "이것은 실로 하늘이 돌본 행운이다"(此實天幸)라고 썼다. 실로 이 전투는 하늘과 땅, 귀신과 사람이 도와 승리한 총력전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스님들도 수도만 하고 앉아 있을 수 없어 분연히 일어섰다. 여수시 덕충동 1829번지 산자락에 위치한 충민사(忠愍祠)는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충무공을 주향으로 모시고 그 우측에는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 좌측에는 안홍국 장군을 배향으로 함께 모시고 있다.

충민사 서편에는 석천사라는 절이 있는데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신 옥형대사와 자운선사가 충무공이 전사한 후에 공의 충절을 잊지 못하여 충무공의 영을 모셔다가 충민사 곁에 제당을 만들고 암자를 건립한 것이다. 일찌기 사명대사와 서산대사가 묘향산, 금강산 그리고 평양 등지에서 승병을 이끌고 육전(陸戰)에 참가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의승수군(義僧水軍)이라는 말은 이곳 여수 땅에서 처음 들었다.

자운선사는 임란이 일어날 당시 흥국사에 머물던 승려였다. 그는 충무공과 뜻을 같이하여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흥국사와 그 주변의 암자에서 수도하던 승려 300여 명으로 의승수군을 결성하고 그 대장이 되었다. 의승수군은 성을 쌓거나 배를 만들고 해전에 참가하는 등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였다. 스님은 임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진중에 따라 다니기도 하고 승군대장으로서 의승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많은 공을 세웠다.

또 전쟁이 없는 휴전기간에는 병사들이 먹을 군량을 구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식량은 스스로 마련하기도 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충무공이 돌아가신 뒤에는 쌀 600석으로 전쟁 중에 목숨을 잃은 병사들과 백성들의 명복을 비는 수륙제를 열고 음식물을 많이 장만하여 충민사에서 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옥형대사는 흥국사, 석천사, 충민사와 깊은 연관이 있는 스님이다. 그는 임란 때 자운선사와 함께 군사들이 먹을 식량을 대어 충무공의 신임을 크게 얻었다. 싸움이 있을 때면 언제나 공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충무공이 돌아가시자 공의 인품과 깊은 정을 잊을 수 없어 충민사 곁에 조그만 사당을 짓고 매일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렇듯 정성을 다하기를 80세가 넘도록 하였는데 바다에서 무슨 사고가 있을 때면 반드시 옥형대사의 꿈에 공이 나타나므로 대사는 더욱 더 공의 나라에 대한 충혼이 죽어서도 이와 같으니라고 감탄하며 죽는 날까지 숭배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순신 장군이 여수를 출발하여 경상도의 옥포와 부산포를 공략할 때에는 조선수군의 군함인 판옥선과 소형 협선 외에 포작선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민간 고기잡이배가 따라붙었다.

그들은 일부 무장을 하거나 군수품을 싣고 장거리 전투항해에 따라나선 민간 동원선으로 비록 전투력은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아군의 사기를 높이는데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적은 새까맣게 몰려오는 포작선 선단을 보고 기겁을 했을 것이 뻔하다. 이처럼 민초들의 끈질긴 항쟁이 있었기에 임진왜란은 결국 조선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0

좋은 글이라고 생각되시면 "추천(좋아요)"을 눌러주세요!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 네이버로 보내기
  • 텀블러로 보내기
  • 핀터레스트로 보내기
4 댓글
구름도사 04-09-22 21:01
임진왜란에서 많은 의병장들과 의병들의 활동은 익히 알고있던 사실이엇지만
세상에 그렇게 알려지지않은 많은 의병들과 스님들까지 수병으로서 해전에도 참전햇다는것은
처음접하는 내용입니다..
조선이 왜란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킬수있엇던것은 모두가 제살길을 찾기위해 분열된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길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를 지쳐야한다는 많은 민초들의 마음이 합하여져서 가능햇다는 섬원주민님의 말씀 지당한 말씀입니다....
글을 읽다보니 섬원주민님 하시는일이 궁금합니다...혹시 역사과 교편을 잡으셧던건 아닌지요,.ㅎ
금방 찾아보니 회사원이시라고 나와잇네요.
아마도 향토사학자도 겸하고 계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ㅎ
티비에서 가끔 향토사학자분들이 나와서 향토의 역사에 대해서 애기하는걸 간혹봅니다...
방송도 좋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향토사학자들이 그 고장의 일선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에게
직접 향토의 역사에 대해서 애기를 들려주는 기회같은걸 좀 만들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수고가 많으십니다...편안한 저녁되십시요......ㅎ
바다의 꿈 04-09-22 23:11
님의 해박한 이순신사랑 역사가 많은 분들과 저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역사를 통해 배우는 것 중 민초들의 나라사랑입니다.
대관들로서 어느누구도 할 수없었든...당파싸움만 하는 그네들하고 차원이 다른 민족사랑은 들어도 보기 좋고 보아도 기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경주월드 04-09-23 00:18
출간하셨다니 거듭 축하합니다.
역시 원의 중심이셔...
섬원주민 04-09-29 20:40
이제 책으로 나왔습니다. 9월 25일 동아일보 "책의 향기"에 서평이 났더군요.

[동아일보 권기태 기자 2004.09.24]

‘이순신 신봉자’인 이봉수씨가 4년간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를
발로 답사해 쓴 ‘이순신이 싸운 바다’(새로운 사람들)를 펴냈다.

그는 “남해안 동쪽 부산포해전지부터 서쪽 진도 인근의
명량해전지까지 일일이 답사했다”며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400년 넘게 지났지만 이순신 수군의
전승 흔적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거제대교 아래 물길을 흔히 ‘견내량(見乃梁)’이라고 합니다.
어민들이 ‘갯내량’이라고 부르는 데서 나왔지요.
바닷물(갯)이 시냇물처럼 빨리 흐르는 물길이라는 뜻입니다.

이순신은 한산대첩 당일 아침 판옥선들을 이곳으로 보냈습니다.
왜구들은 상대 선박에 근접해 기어오르는 전술을 선호해
좁은 갯내량에 우리 판옥선이 나타나자 정신없이 쫓아왔지요.

73척이나 되는 왜선들이 결국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돼
포격전에 나선 우리 수군에 완파됐습니다.
어민들은 ‘갯내량’이라고 부를 때마다 한산대첩을
떠올리곤 하더군요.”

그는 이 밖에도 남해안의 ‘두억포’는
왜구들 머리를 수없이 벤 곳,
‘개미목’은 개미떼처럼 많은 왜구들을 수장한 곳,
‘하포’는 이순신이 군수품을 하역한 곳,
‘고동산’은 망군(望軍)이 이순신의 수루를 향해 고동을 분 곳임을
구전(口傳)을 통해 확인했다.

경남 마산시 바닷가에서 자란 그는
영국에서 환경계획을 공부하고 1999년 경남 창원시의
토지공사 경남지사에서 근무하게 되자
이순신 전적지를 훑기 시작했다.

2001년 경기 성남시 분당의 본사로 옮겨와서는
경남 통영시 오곡도에 있던 폐가를 사들여
이곳을 ‘베이스캠프’로 삼고는 태풍이 불 때를 제외하곤
주말과 휴가 등 모두 140여 차례 남해안으로 내려갔다.

토지공사 박물관 소장품인 조선지도 ‘동여도’ 복사본과
현재 지도, ‘난중일기’, ‘이 충무공 전서’, 카메라를 늘 갖고 다녔다.

그래서 이 책에는 이순신의 첫 해전인 옥포해전부터
마지막 노량해전까지의 전황과 옛 지도, 현장 답사기,
사진 등이 가득하다.

그는 “문헌에서 취재한 이순신 관련 서적들을 읽어 봤지만
현장감과 고증에 한계를 드러내곤 했다”며
“나는 역사학이나 지리학 분야의 아마추어지만
이순신 장군의 전승지가 오늘날 어떻게 변했는지를
직접 확인해 현장감 있는 기록을 남기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

 
포토 제목
 


인낚 최신글


인낚 최신댓글


온라인 문의 안내


월~금 : 9:00 ~ 18:00
토/일/공휴일 휴무
점심시간 : 12:00 ~ 1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