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떠나 보내며......,할머니 연세 백하고도 하나입니다.
1세기를 사셨으니 好喪이라고 합니다.
지역마다 장례 풍습이 다른데, 아랫지방에서는 好喪이라고 북, 장구, 꽹과리, 징을 치며
잔치를 하는 풍습도 있습니다.
문상을 갔다가 이런 풍경을 보고 황당하기도 했습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그러나 好喪과 惡喪의 구분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구분해 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亡者의 입장에서 죽음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할머니께서는 약간의 치매끼가 있으셨습니다.
얼굴에 뭐가 났다는 생각에 손톱으로 뜯으신 것과 치매가 화근이었습니다.
할머니께 주의를 주고, 손을 묶어 놓기도 했는데 지켜보지 않으면 똑 같은 일이 되풀이 되었습니다.
결국 상처가 커지고, 심지어 피부암까지 발전되고 말았습니다.
아버님 형제들과 손주들이 모여 할머니께 방사선 치료를 받도록 결정했습니다.
할머니 연세가 너무 많아 방사선 치료는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가벼운 치료는 하되 방사선 치료는 하지 말자는 소수 의견도 있었으나 방사선 치료를 받기로 했습니다.
자식과 손주의 입장에서 할머니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치료를 하면 더 오래 사실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적인 생각만을 했기에 그렇게 결정했던 것이었습니다.
방사선 치료를 하지 말자는 소수 의견은 불효자라고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소수의 의견이 현실로 다가왔고,
할머니는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 의견과 입장을 들어보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연세가 많으셔서 올바른 결정을 하지 못할 것이다. 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우리 다수는 일방적인 생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체력이 너무 떨어져서 죽과 물조차도 혼자서 삼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영양제 수혈로 생명을 연장해 가셨습니다.
결과론 적으로 방사선 치료를 하지 말아야 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게 했다면 최소한 1년은 더 사시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 봅니다.
할머니께서 병원에 계시면서 저의 가족은 주말마다 인천을 다녀왔습니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쯤이었습니다.
주무시는 것을 깨워, “ 할머니 저 왔어요. 저 누군지 알겠어요. ”
라고 말하니 한참을 쳐다보시다가 “ 윤지 ” 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날은 오랫동안 할머니께서 제 손을 잡고 놓지 않으시면서 흔들고, 제 얼굴을 가까이 오게 하여 한참을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다리도 주물러 달라고 하시며 “ 아이고 시원하다. ” 했었습니다.
그때 주무신다고 깨우지 않고 돌아왔다면 많은 후회를 했을 것입니다.
저에게 할머니의 존재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십니다.
생모가 아버지와 이혼을 하셨고, 아버지께서 장남이어서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집은 13평짜리 연립주택이었고 저의 사형제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이렇게 일곱식구가 함께 살았습니다. 우리 사형제가 누우면 할머니는 우리의 발 아래 문쪽에 주무셨습니다. 잠들기 전 이런 저런 얘기로 희희낙락하던 우리에게 “ 조용히 하고 자 ” 라고 호통치시던 생각이 선하게 납니다.
어렵고 힘든 시절 할머니께서는 치킨을 좋아하셨습니다.
요즘같이 브렌드 있는 치킨이 아니라 시장에서 기름에 튀겨낸 닭이었습니다.
참 맛있게 드시던 생각에 가끔 치킨을 사다가 드리곤 했었는데, 그럴 기회가 이제는 없어졌으니 미안하고, 아쉽습니다. 할머니 산소에 갈 때 꼭 가져가야 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삼우재를 지내고 내려 왔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것은 자연의 섭리인데, 왜 이렇게 아쉬운지......,
할머니 극락왕생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사랑해요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