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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을 두고 쪽바리을 통괘하게 물리친 조상님들 ~~~~

G 10 3,377 2005.03.19 16:55

1883년 음력 4월 초8일 강원도 강릉에서 울릉도로 낙향한 할아버지(홍재현 옹)께서 4일간 뱃길로 해서 지금의 울릉군 북면 현표동에 당도하셨을 때, 그 때 울릉도 주민이라고는 고작 두 가구가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하루는 높은 산에 오르게 되었는데, 먼 동쪽바다에서 또하나의 섬을 발견하였다. 일찍이 읽은 바 있는 <세종실록> 및 <동국여지승람> 등 고서에서 밝힌 우산도(于山島), 지금의 독도임을 짐작케 되었고, 1897년 6월에 할아버지께서는 독도 길에 올라 그때 울릉도에서 향나무 한그루를 가져가서 지금의 독도 동도에 심었다.

할아버지는 울릉도에 돌아올 때는 바다사자 세 마리를 잡아와서 울릉도 주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칡과 소라나 생복만으로 연명하던 주민들에게 지방질을 공급하게 된 것을 퍽 기뻐하시며 이후로는 지방질을 독도에서 얻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다음해(1898년) 독도에 바다사자를 잡으러 가셨는데, 의외로 그곳에서 일본인 무라카미(村上)란 사람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대화해본즉 그들은 생업으로 바다사자를 잡아파는 동물상이라 했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이 섬은 자고로 우리나라 땅인지라, 앞으로는 두번 다시 이 섬에 오지말 것을 얘기하였다. 할아버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일본인이 타고온 배에 동승, 일본으로 같이 갔다.

일본에 가신 할아버지는 그곳 관헌에 울릉도와 일본사이에 위치한 우산도, 지금의 독도는 한국의 땅인지라 앞으로 일본인의 출어를 금지할 것을 당부하고 일본인이 내주는 배로 울릉도로 돌아오셨다고 내가 어릴 때 여러 번 무용담처럼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할아버지께서는 평생을 두고 돌섬(할아버지가 부르던 독도명)은 우리땅이며 울릉도의 속도인지라 울릉도 사람이 잘 보존해서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해방후인 1948년 6월30일 울릉도 어민들이 독도에 출어하였다가 폭격 연습중이던 미 5공군의 오폭으로 30여명이 폭탄에 맞아죽은 사건이 있다. 경북도지사가 1951년 독도에 위령비를 세울 때 할아버지께서 노구의 몸으로 독도에 같이 가셔서 조사를 낭독하셨다.

"천지신명이여, 이 섬은 하늘이 주신 우리의 땅이며 예나 지금이나 우리 동포의 생활의 터전이기에 우리 동포가 아끼고, 또 지켜나갑니다. 오늘도 30여명의 우리 동포는 돌섬의 수호신으로 이 섬을 지키고자 합니다"라고 하시던 그 애절한 목소리의 조사 끝대목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독도에 다녀오셔서 "순칠아, 멋을 아느냐"고 물으셨다. 반문하는 필자에게 "멋이란 외관인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참 멋이란 '인간 내재(內在)'의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진(眞)의 사고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가 싸워 독도를 되찾아라"

6.25가 터졌을 때 내가 소속된 기갑연대는 청진까지 진격했다가, 나는 원산 부근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후송돼 육군병원 생활을 하다가 1952년 7월 명예제대를 하고 지팡이를 짚고 고향인 울릉도로 돌아오게 되었다. 할아버지께서 무척 반가이 맞아주시면서도 "너 영영 병신이 되는 것은 아니냐"고 무척 걱정을 해주셨다.

어느날 지팡이를 짚고 경찰서장을 찾아갔다가 뜻밖의 사태를 목격하였다. 경찰서 마당 한쪽에 '島根縣 隱岐郡 竹島(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란 표목이 높여있는데, 그 크가기 4.5각이고 길이는 6척이나 됐다. 그 순간 나는 아찔함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서 얘기로만 수없이 들었던 독도사태가 실제로 발생하였구나!'

"서장님, 저 마당의 팻말이 뭡니까"라고 물었더니, 서장의 설명은즉 독도에서 출어한 울릉도 어민들에 의해 독도 현지에서 일본이 자국영토 표기를 한 것이 발견돼 경찰서장이 대응조치로 '한국 울릉군 독도'란 팻말을 꼽았는데, 그후로도 이같은 팻말 바꿔치기가 여러번 있었다는 것이었다. 근래에 와서는 미역 따는 우리 어부들까지 일본의 위협을 받고 있어 여간 걱정이 아니라고 했다.

꽤씸한 일본놈들의 소행에 나는 분노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6.25파른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의 행정권이 독도에 미치지 못한 틈을 타서 또다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폭력으로 선량한 어민들을 위협하는 파렴치한 일본당국의 처사를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경찰서에 다녀온 나는 할아버지께 그간의 오고간 얘기이며, 미역 따러 간 우리 어민들이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PS함의 위협으로 작업을 중단하고 울릉도로 쫓겨 돌아온 사실등을 소상히 전해드렸다. 할아버지는 분개해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울릉도를 개척할 당시 어려움도 많았고 일본사람과는 죽고 죽이는 싸움도 많이 했는데, 이제 우리가 무엇이 두려울 게 있느냐. 나는 늙어서 독도에 갈 수 없다지만 너희들은 군에서 전투하는 것도 배웠고 또 젊은 사람들 아니냐."

"독도는 울릉도 도민들이 문전옥답과 같이 애지중지하는 우리의 생활터전이니 기어이 너희들이 그곳에 가서 싸워 독도를 되찾아야 한다."

독도의용수비대 출범, 무장후 독도 입도(入島)

할아버지 말씀후 울릉도 출신 향군 40여명을 규합하여 '독도의용수비대' 조직의 필요성과 향후 독도에서 생활할 계획을 의논하고 서서히 독도 진주를 앞두고 준비에 착수했다.

독도의용수비대가 조직돼 현지에 진주하기 전인 1952년 가을, 나는 무기 등 장비를 구하기 위해 부산으로 나갔다. 할아버지께서는 군자금으로 3백만원을 주셨다. 여기에 부산으로 팔기 위해 갖고 갔던 오징어를 판 대금과, 마을 사람들의 오징어 판매 수수료를 합하니 약 5백만원의 큰 돈이 되었다. 이 가운데 2백만원을 무기구입 공작금으로 쓰고, 나머지 돈은 쌀과 개인장비, 심지어 누룩까지 부산에서 구입했다. 전우였던 변서갑 중위의 주선과 양공주들의 비상한 솜씨로 기관총을 위시하여 탄알과 M1 소총도 입수할 수 있었다. 당시 부산 '양키시장'에서는 권총과 소총을 사고팔기가 용이한 때였다.

독도의용수비대는 현지에 주둔할 전투대 2조, 각조의 인원은 15명씩이었으며, 이밖에 울릉도보급 연락소의 3명과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으로 모두 합쳐 45명이었다. 이 가운데 군 출신이 아닌 사람은 보급선의 선원과 연락소의 3명뿐이었아고, 나머지는 6.25때 각 전선에서 싸운 용사들이었다.

처음 독도에 진주할 무렵의 장비는 경기관총 2정, M2 3정, M1 10정, 권총 2정, 수류탄 50발, 그 이외 독도에서 생활할 장비와 현지에서 쓸 0.5톤 보트 1척 등이었다. 또 울릉도와 독도간의 통신연락을 위해 집에서 잘 기른 벨기에산 전서구 3마리를 사용하였다.

1953년 4월20일 우리는 언제 돌아올지 기약없는 장도에 올랐다. 우리가 탄 배는 만든지 10년이 넘는 낡고 보잘 것 없는 5톤미만의 오징어잡이 어선이었으나 우리에게는 전함이요 유일한 보급선이었다. 이날 우리는 3시간 항해끝에 독도에 상륙했다.

1953년 7월23일 '1차 전투'

의용수비대가 독도에 상륙해 막사로 진지를 구축한 지 석달이 지난 1953년 7월23일 새벽 5시 0분. 정확히 두시간씩 교대하며 근무를 서던 중 전망보초 김은호로부터 "일본 군함이다!"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우리 수비대의 막사 서 전방 2백미터 위치에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PS 9함이 진격해왔다.

우리 수비대원들의 동작은 기민했다. 조상달, 이상국, 화영문은 전마선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나와 함께 한 조가 되고, 나머지 대원들은 서기종의 지휘로 다른 한 조로 양분해서 공격하기로 했다. 신호탄과 함께 엄호사격을 바란다고 부탁하고 우리 결사대는 보트를 타고 PS9함과의 거리 20m까지 돌진했다.

"탕! 탕! 뚜루룩! 탕탕! 탕탕!"

연발하는 총성속에 각자가 지닌 소총과 보트에 설치된 경기관총에서 2백여발의 실탄이 PS 9함을 향해 집중적으로 퍼부어졌다. 그러나 함정 철판의 두께가 너무 두터워 구멍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닥친 총격과 육지에서 쏘아대는 지원사격에 당황한 일본함정은 가제바위 옆을 우회해 멀리 동쪽을 향해 도망갔다.

막사쪽으로 보트를 돌려 돌아오면서 바다사자 한마리를 잡아 막사에 도착했다. 그러자 부대본부에 남아 지원사격을 했던 대원들이 일제히 찰싹거리는 물 곁으로 뛰어들어 "와!" 하는 함성과 함께 특공대원들을 맞아주었다. 동해의 절해고도인 이 독도에서 나라 사랑하는 대원들의 갸륵한 마음들이 서로 부등켜 '네가 나'를 안아주는 전우애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바다사자의 즉석 불고기에 한 잔씩의 술이 돌자 좌중을 향해 한마디 말을 아니할 수 없었다.

"오늘의 전투는 순간적으로 맞게 된 것이었지만 용맹한 동지들의 조국애로써 일본함정은 물러갔소. 이는 우리 독도수비대의 승리일뿐 아니라 길이 역사에 남을 쾌거요. 다만 중화기가 없는 탓으로 PS 9정을 바닷속 깊이 격침시키지 못한 것이 한이 되오. 그러므로 어떻게든 중화기를 구해볼 작정이요"하고 말하니 좌중에서 박수와 함성이 터져나왔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없는 동안 독도수비를 더욱 철통같이 해줄 것을 당부하고 다음날로 독도 근해에 출어중인 강원도배에 편승해 묵호에 당도했다. 이튿날 대구에 도착 즉시 경북병사구 사령부에서 모과장과 얘기가 되어 정력에 좋다는 바다사자를 잡아준다는 미끼로 M 2정을 쉽게 손에 넣었다. 또한 경북경찰국에서는 노획한 소련제 직사포 한 문과 조준대가 없는 박격포 한 문을 얻었다. 그러나 실탄이 없으니 어찌하랴!

다시 경부선을 타고 부산으로 달렸다. 손가방에 든 군자금이라야 현금 2백만원과 바다사자의 숫놈 생식기 1개가 고작이었다. 또다시 양공주 등의 도움으로 포탄과 무기들을 구입해 독도로 금의환향할 수 있었다.

다음해인 1954년 8월23일 우리는 이 무기를 바탕으로 독도에 접근하려는 일본 해안보안청 소속 순시선을 총격전끝에 또 퇴치할 수 있었다.

1954년 11월21일, 일본함정 3척-군항기 물리친 '독도 대첩(獨島大捷)'

1954년 11월21일. 이날 역시 일찍 일어나는 버릇 때문인지 여느 때와 같이 일어나자마자 밖으로 나가 섬 주위를 한바퀴 돌아는데, 전방 1km 해상에서 일본 함정이 독도를 향해 오고 있지 않은가? 본능적으로 좌우를 돌아보니 오른쪽, 왼쪽에도 일본 함정이 보였다. 하늘에는 일본군 비행기도 보였다. '이것들이 완전히 포위 상태에서 독도를 공격하는구나' 직감적으로 느꼈다.

막사 안에 뛰어들어 비상을 외치고 쌍안경을 들어 확인하니 1천톤급의 일본함정 PS 9, 10, 16함이었다. 평상시 훈련한대로 우리 대원들은 기민한 동작으로 전투태세를 갖추어 명령만 기다렸다.

"일본 함정이 500미터까지 접근했을 때 권총으로 신호한다. 박격포는 먼저 PS 9함을 때리고 중화기는 박격포 뒤에 쏘되 지휘탑을 파괴하고 다음 좌우쪽 10, 16함을 같은 요령으로 공격한다"고 명령을 하달했다. 우리 독도수비대가 독도에 진주한 이래 몇차례 일본함정의 침입이 있었으나 이번처럼 많은 함정이 동원되기는 처음이라 우리로서는 단단한 각오가 있어야 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일본함정. 긴장된 얼굴의 대원들. 누구 하나 말없이 응시하는 그들의 눈빛.

'임란때 이순신 장군은 열세의 장비로 일본을 대적하여 싸우지 않았는가? 지금의 우리는 이만한 장비로 유리한 위치인 육지에서 일본 함정을 맞이하고 있다. 이번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다시는 일본함정이 독도를 침입 못하게 해야지.'

나 역시 어금니를 굳게 악물었다.

일본 함정은 7백미터에서 6백미터로 다가오고, 마침내 M소총 사정거리에도 들어왔다. "탕!" 한발의 권총 신호와 함께 일제히 독도가 떠나갈듯 총성이 울려퍼지고, 6.25때 명사수인 특무상사 출신 서기종이 쏜 박격포 제1탄이 PS 9함에 명중되어 선수에서 몇 사람이 나가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일본 함정은 불의의 총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면서 PS 16함에 구조요청을 했고, PS 9함에 접근한 16함은 예인 시도를 하려고 로프가 9함에 건너가고 중화기에 치명상을 입은 PS 10함은 먹구름 같은 연기를 뿜어내면서 동쪽으로 도망을 하고 있었다.

치명상을 입은 일본 함정은 동쪽으로 사라져 가는데, 비행기만은 계속 독도를 선회하면서 위협하고 있었다. 한 눈도 비행기를 놓치지 않고 대공전 자세에서 완벽을 기하자 사태 불리로 판단한 비행기도 동쪽 하늘을 향해 사라져갔다. 일제히 일어선 대원들은 "와아!"하는 함성과 함께 서로 부둥켜 안고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다.

일본은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 NHK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나 다를까 정오 뉴스에 그들의 소위 '다케시마'에서 한국경비대가 발포를 해서 일본 해안보안청 함정들이 피해를 입고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일본정부는 즉각 한국정부에 항의각서를 제출하고, 당시 독도우표가 첨부된 우편물을 일본에서 한국으로 반송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한국-일본 정부간에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지게 된다.

1956년 12월30일 우리는 독도 상륙 3년 8개월만에 무기와 임무를 국립경찰에 인계하고 울릉도로 돌아왔다.

저역시 이글을 보니 정말 감개가 무량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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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댓글
G 황용 05-03-19 17:36
정말 긴글이지만 시간 흐르는줄 모르고 눈앞에 펼쳐지는 영상에 흠뻑 취했습니다
독도 수비대 원조님들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조국을 알기에, 애국이란걸 알기에, 우리 선조는 그렇게 온 몸으로 지켜 주셨군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젠 우리가 지키겠습니다!
G 수향 05-03-19 18:29
그들이 아니었다면 독도는 벌써......
독도의용수비대에 관한 글을 퍼 왔습니다...


[* 독도의용수비대 *] 그들은 누구였나 국민일보 1996-02-13 27면

◎“외로움·배고픔 이기며 우리의땅 지켰죠”/일이 팻말세우자 36명이 자발경비/식량·땔감 각자마련… 오징어배로 53년 「출정」/보급선 안와 해초로 1주일씩 연명하기도/생존15명 유공자 지정안돼 “어려운 노년”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독도가 우리땅으로 온전히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걸고 이곳을 지켜온 「독도의용수비대」의 처절한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 했다. 일본이 6·25전쟁을 틈타 독도를 차지하려고 혈안이 돼 있을때 우리땅을 지켜야 겠다는 일념에서 가족조차 내버려두고 3년8개월동안 독도를 사수해온 독도의용수비대 36명. 그러나 이들의 완강한 저항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의도가 수포로 돌아가 현재 독도가 우리의 영토라고 떳떳이 주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당시 독도의용수비대(대장 홍순칠·작고)는 정부의 명령에 의해서 창설된 것이 아니라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사랑과 국토방위의 정신에서 자발적으로 결성한 순수 민간조직. 이들은 지난 53년 일본이 우리정부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따 독도에 상륙해 「죽도」「일본영」이라는 팻말을 세우는등 일본 영토표시를 하고 수시로 근해에 순시선을 보내 독도점령을 노골화하자 이에 맞서 수차례 목숨을 건 전투를 벌였다. 각자 무기를 모으고 집에서 식량과 땔감을 준비해 6t짜리 오징어잡이배를 타고 독도로 「출전」했던 이들은 거친 풍랑으로 3∼4일씩을 예사로 굶는 등 악조건에서 싸워야 했다.

의용수비대는 2개전투분대와 보급대 수송대 후방지원대등으로 편성됐으며 0.5t보트 한 척,미군과 정부에서 구입한 박격포 직사포 경기관총 각 1정,M1소총 20정과 실탄 2만4천발로 무장했다. 의용수비대는 2개분대가 한달씩 교대로 근무하며 독도근해에 나타난 일본순시선을 10여차례 물리쳐 일본이 한국정부에 수차례항의각서를 보낼정도로 용맹을 떨쳤다. 이들은 전쟁이 끝나 정부에서 어느정도 여유를 찾자 56년12월 울릉경찰서에 임무를 인계하고 철수했다.

당시 수비대에 참가했던 이규현씨(71·박격포사수·울릉군 도동3동)는 『보급선이 제때 오지않아 1주일을 해초로 연명할 때도 있었지만 우리의 힘으로 독도를 지킨다는 생각으로 배고픔과 외로움을 싸워 이겼다』고 말했다. 이들은 독도에서 철수한뒤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를 결성,홍대장을 중심으로 70년대 초반에 현재 정부가 추진중인 방파제 설치등 독도개발을 건의하기도 했다. 66년 박정희대통령으로부터 홍대장이 공로훈장을,대원들이 방위포장을 각각 받았지만 국가유공자로는 지정되지 않아 대부분 어려운 생활을 했으며 생존자 15명은 늙고 병들어 울릉도와 서울 포항 경주등지에서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홍대장의 부인으로 유일한 여성대원이었던 박영희씨(63·보급대원·서울 개포동)는 『87년 남편이 돌아가셨을때 한자리에 모인뒤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대원들이 많다』고 말했다.〈박주호〉

◇생존대원 15명 김병열 양봉준 이규현 박영희 정원도 서기종(67·1분대장·경북 경주) 최부업 (66·경북 포항) 김용근(68·경북 울진) 김영복(68·경북 포항) 하자진(68·경북 포항) 김영호(66·울릉군 도동) 이필영(72·울릉군 저동) 구용복(75·대구) 정현권 (77·울릉군 저동) 유원식(67·울릉군 도동)

◎「몸 늙었지만 독도사랑 변함없어」/독도수비대 정원도씨/“당시 대원 애국으로 독도 사수/일본 이제와서 생떼 분노솟아”

『우리 대원들이 어떻게 지켜온 독도인데 일본이 이제와서 생떼를 쓰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독도의용수비대 제2분대장직을 맡아 독도를 사수해온 정원도씨(67·울릉군 울릉읍 도동3리 297의2). 정씨는 『비록 몸은 늙었지만 독도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40년이 지난 지금 조금도 변함이 없다』며 『당시 대부분 20대였던 대원들이 적극적으로 내일처럼 나섰기 때문에 정부의 지원없이도 3년8개월동안이나 독도사수가 가능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정씨는 지난 54년 군복무를 마친뒤 일본사람들이 독도에 와서 「일본영」이라는 비석을 세우고 독도가 자기들 땅이라고 우긴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독도의용수비대에 스스로 자원했다.

『당시 일본 해상보안청소속 순시선이 하루가 멀다하고 독도주변을 정탐하자 한번은 우리측이 보유하고 있는 무기를 총동원해 이들을 공격하자 그들이 혼비백산해 되돌아간 적도 있었습니다』정씨는 『젊은 세대들이 애국심으로 뭉친다면 일본의 침략의도를 물리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울릉=김재산〉
G 호미 05-03-19 19:07
독도의용수비대 할배님들께~~~~~~ 경례 !!!! m(_ _)m
그라고 쓰벌넘들아~
지금이라도 국립묘지에 모시고 합당한 대우를 해줘라~~ 잉~
존말~할때 !!!
G 하얀민박집 05-03-19 21:26
호미님 께 기립박수를 보냅니다
뭐~ 축구 한번 하는데 잔듸를 3억 짜리 깔아
정신차리라 국민들 독도는 우리땅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
안들리냐
분위기 파악 못하고
진짜 잘해라
G 백도사랑 05-03-19 23:08
더욱더 강력한외교로 독도의주권을 확고히해야합니다
삼가 경의를 표합니다
G 석양의뽈라구 05-03-19 23:20
정말 생을 달리하신분은 국립묘지에 안장하시고 합당허게 국가유공자로
되었음 하는 바램 입니다. 쪽쌔끼들 헌테 돈만 않빌렸음.
정말 이나라가 싫습니다. 자기땅 가지고 바른소리 한번 못내는 이나라...
전국민이 아니더라도 울인낚회원님은 부디 큰소리을 내 주시길 바랍니다.
자장면 한그릇 먹꼬 내는세금 아깝다 아까워....아까워
G 부산 대물의꿈 05-03-20 01:43
이것을 영화로 만들면 대 히트 ................돌아온 독도수비대 ^^
G 허거참 05-03-20 01:58
감동입니다.
우리의 애국선배님들,,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국가적 차원의 보상과 배려를 마땅히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낚시인이 나서서..인낚에서 앞장서서 한번 해보면 어떨지..
G 호미 05-03-20 13:12
남천동 메가리님~ 바람쇠러 안가셨읍니꺼~ ^^
G 송프로 05-03-20 19:55
~부산 대물의꿈님 글처럼~이것을 영화로 제작 한다면..무척 감동적인
영화가 될듯 싶군요..꼭 대어 낚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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