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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금 소전(이대일님 작품발췌)

1 멈춤봉 4 959 2017.03.03 21:57
그날은 내가 속한 낚시회가 출조하는 날이었다. 이 낚시회는 '그린'이라는 바다낚시와 '실버'라는 민물낚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나는 실버클럽 소속이었다. 중년을 넘으니 동아리에 살아남는 것도 수월치가 않았다. 산악회에선 느린 걸음보다는 길을 잃어 자퇴했고 노인 춤 클럽인 '실버스 왈츠'에서는 회전이 느려서 다른 커플의 공간을 뺏는다는 지적에 그만두었다. 그러나 낚시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고향 마을에서 익힌 붕어 낚시는 일찌기 삼시의 끼니를 거들었고 바다낚시는 새참의 안주거리였다. 다만 젊은 회원들이 돌아서서 담배를 태운다든가, 어쩌다 시작된 농염한 이야기 중엔 슬그머니 말문을 닫아버린다든가, 술자리에선 늘 비껴 마시는 예우가 내겐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가끔은 진한 농담으로 좌중을 들뜨게 만들기도 하고, 올드 팝을 흥얼거리기도 하고, 내 할아버지에게 들은 20세기 초반의 문학 이야기를 약간 과장되게, 이를테면 김유정의 들병이는 기본이 동동주 세 주전자에 파전이 하나라든가, 이상(李箱) 일당들의 단골이었던 종로의 엔젤 카페의 여급들은 대개가 매상보다는 로맨스에 치중했다든가, 심지어는 이상과 동거했던 금홍이에게 아들이 있었다는데 누구의 아들일까 등의 꽤 야릇한 이야기를 이리저리 각색하면 청자(聽者)들은 금세 숨을 죽이고 기대에 찬 시선을 보내주었다.
   나의 조부님은 휘문 출신으로 상허, 이무영, 김유정, 정지용, 김영랑 등과 동문수학하신 걸 늘 자랑스러워 하셨다. 할아버진 문학을 좋아하셨지만 집필은 없었고 젊음의 대부분을 신문사 사회부 기자로 보내셨다. 특히 순수문학 단체인 구인회(九人會)에 대해선 많은 숨은 이야기를 알고 계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고증에다 1930년대의 연보를 적절하게 짜깁기하여 어느 신문사에 팩션 소설을 연재하는 중이었다. 팩트에다 살을 붙여 대책 없는 사연을 쏟아내었다. 그러다가 임자를 만난 것이었다.
   조과에 따른 시상이 끝나고 뒤풀이 술잔이 돌아갈 즈음이었다. 방죽 쪽 물푸레나무 아래 노인 한 분이 막 화투장만한 새끼 붕어 한 마리를 낚아 올렸다. 웬만큼 낚았는지 잠시 대를 걸치고 댓 마리 붕어를 능숙하게 다듬었다. 빠른 손놀림은 아니면서도 마치 바둑의 정해진 수순처럼 깔끔한 솜씨였다. 그는 종이컵에다 그득히 따른 소주를 천천히 쉬지 않고 다 마셨다. 그리고 왼손바닥에 깻잎을 깔더니 낚은 붕어를 얹고 풋고추 한 개를 쌈장에 쿡 찍어 걸쳐 우적우적 씹어 삼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는 아예 관심이 없는 듯 밀짚모자를 푹 누른 채 다시 대를 잡았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려다가 도로 앉았다. 낚시와 붕어와 한 잔의 술, 그 수순을 익힌 진부한 낚시 풍경을 세기를 넘어도 볼 수 있다니, 나는 호기심에 가득 차 계속 그를 주시했다. 괜스레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 분위기를 다칠까봐 오히려 내 쪽이 조심스러웠다. 얼마 후 그의 찌가 쭉 솟더니 꽤 괜찮은 입질인가 했다. 그러나 옆으로 미끄러지던 찌가 춤을 추도록 그는 챔질을 하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다가갔을 때에는 찌는 이미 수초 속으로 처박혀버렸는데 그는 한 잔의 술에 취한 듯 아니면 명상에 잠긴 듯, 마냥 눈을 감은 채였다.

   “어르신, 챔질을 하셔야지요. 찌가 트로트를 한참이나 추었습니다요.”
   나보다도 한참이나 위일 것 같은 노인에게 초면부터 농담을 섞었다.
   “그랬어요? 두고 봅시다. 이번엔 블루스를 댕길지도 모르니...”
   나는 그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늦게 들어 올린 낚싯대는 당연히 빈 대였다.
   “옛날 찌라서 스텝이 힘이 드나봅니다.”
   그는 그제야 나를 바라보았다. 불그스름한 얼굴에 인정이 가득한 눈빛이었으나 어쩐지 회한이 깊게 숨은 듯했다.
   그는 천천히 가방에다 낚싯대를 챙겨 넣었다. 그가 낚시가방에 붙은 작은 포켓을 열었을 때 뭔가 낯익은 것이 눈에 띄었는데 그건 한 권의 책이었다. 그냥 낡은 책이려니 하면서도 눈여겨 본 건 그 책의 제목이었다. 늙은 낚시꾼의 가방에서 나온 궁서체의 세 글자, 표지 상단을 채운 건 분명 이태준의 수필 '무서록(無序錄)'이었다. 나는 놀라운 호기심으로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니, 상허(尙虛)의 책이 아닙니까?”
   이번엔 그가 나를 보더니 챙기던 받침대를 도로 놓았다.
   “허허, 왠지 오늘 이 못에 오고 싶더라니...”

   그는 남은 소주와 다듬은 붕어를 펼쳤다.
   “저 책에서 ‘낚시질’이란 수필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거기엔 물의 편안함과 장한(長閑)함도 있었지요.”
   그사이 낚시회 총무가 우리들의 모양을 살폈는지 소주 한 병을 들고 왔다. 통성명을 하고 잔을 채우는데, 낚시회 젊은이들이 내게 했던 것처럼 나도 그의 앞에서 몸을 비틀어 마셨다. 오랜만에 붕어 쌈을 쌌다.
   그는 기사생이라 했으며 옛날 이름은 붓들이었고 열다섯 살이 되어서야 호적상 이름을 받았다고 했다. 어림잡아 셈을 놓아도 여든이 가까웠다. 그가 밀짚모자를 벗자 굵은 주름 아래 편안한 눈빛이 오히려 장한하게 보였다. 함부로 접근이 어려운 숱한 이력의 경우로 한가하면서도 오만하지 않는 여유가 습관처럼 배어있었다.
   “내 어머니의 고향은 들이 끝없이 이어져 지평선을 이루는 황해도 연백이었어요. 가을이면 누런 들논이 땅끝까지 퍼졌으니 그 너머는 바다라고 하셨어요. 그 넓은 들처럼 부유하라고 붓들이라는 이름을 지으셨다나요.”
   “그러셨군요.”
   “장한함보다 통한(痛恨)함이었겠지요. 모두가 굶기를 밥 먹 듯했으니까.”
   “어르신, 장한함이란 어떤 지경을 뜻하는지요?”
   나는 분위기도 읽지 못한 채 제법 고만(高慢)한 흥에 겨워 물었지만 금방 후회했다. 그는 마치 준비나 한 듯이 거침없이 답하였다. 팔순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 정돈된 부드러운 음성이 듣는 이를 편안하게 했다.
   “넉넉함이라 할까요. 상허의 벗인 근원(近園)은 조선의 아름다움을 네 가지로 요약했지요. 고담(枯淡), 청아(淸雅), 한아(閑雅), 장한(長閑)이 그것들인데 장한을 유장함과 여유라 했습니다. 또 조선민족의 특색을 구수하고, 시원스럽고, 아담하고, 어리석다고 했으니 장한한 낚시질은 어리석은 짓일까요. 허허허.”
   “사람도 붕어도 어리석긴 마찬가지겠습니다.”
   나는 그를 따라 웃었지만 실은 그의 설명을 잊지 않으려 단단히 외우는 중이었다.
   “상허가 서른여덟일 때 쓴 글을 팔순의 노인이 들고 다녀요. 저 글을 읽다보면 편석촌(片石村)의 말처럼 저류를 흐르는 전율하는 감성이 아직 내 가슴에 살아 움직인다우. 그래서 나도 누구에겐가 할 말이 남아 있었어요.”
   편석촌은 1933년 6월 25일자 조선일보에서 '스타일리스트 상허를 논한다'에서 상허를 소박한 자연 위에서 조는 듯이 꿈꾸는 문장가, 투명한 감성으로 인생을 입체적으로 그리는 감성의 누가(樓家)라는 극찬을 서슴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저 역시 동감입니다.”
   “오죽하면 환쟁이 근원(近園)이 상허의 수연산방(壽硯山房) 따라 성북동 골짜기로 들어갔는지 짐작이 가지요. 상허가 이름 지은 노시산방(老枾山房)에서 학의 날개 같은 유려한 문장 유곡에 순장하기를 주저치 않았습니다.”
   그는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말씀을 낮추기를 청하려다 행여 말허리를 자를까싶어 그만두었다.
   “1943년 열다섯 살이었던 나는 어머니가 주신 한 통의 편지를 가지고 성북동 248 번지를 찾아 떠났지요. 그러나 상허는 이미 철원 안협으로 떠난 뒤였습니다. 할 수 없이 상허의 친구인 근원 선생이 계시다던 성북동 골짜기의 노시산방을 찾아갔어요. 수향산방으로 바뀐 그 집은 화가 김환기가 새 주인이었는데 친절하게도 하루를 묵으라며 저녁상까지 내주셨습니다. 큰 채에 붙은 상심루(賞心樓)라는 방에다 이부자리도 주셨어요. 이튿날 주소와 주먹밥을 받아 쥔 나는 강원도 철원으로 떠났습니다. 나는 어떻게든 가야 했어요. 어머니는 30원을 쥐어 주시며 해결을 못 보면 당신을 찾지 말라고 하셨으니까요. 어머닌 처음이자 마지막인 눈물을 보였습니다.”
   팔순의 노인이 당시의 역경을 선명하게 기억함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1세기 전에 태어난 근대 문단의 주인공들을 마치 내 할아버지의 툇마루 이야기처럼, 눈에 밟히듯이 마른 목젖을 삼키며 추억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뛰고 입이 말랐다.
   “어머니의 편지는 꼭 전해야 했습니다. 어머니의 기침이 만든 30원도 그 편지 때문이었으니까요

기생이었던 내 어머닌 문학엔 백지였지만 문학가가 세상의 대우를 받는 데는 꽤 부러웠던지 조선 최고의 소설가인 상허처럼 되라시며 매일매일 채근을 하셨습니다.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민적이 없어 보통학교도 못 간 내가 당시에 할 수 있었던 일은 다방의 사동뿐이었지요. 어머닌 그걸 급사라고 했습니다. 말이 좋아 사동이고 급사이지 차도 끓이고 청소와 허드렛일에다 가끔은 단골손님의 구두도 닦아야 했어요. 구두의 심심한 냄새, 나는 그걸 아버지 냄새라 여겼습니다. 서당에서 돌아오면 늘 댓돌 위에는 어머니의 고무신 옆에 까만 구두가 있었지요. 작은 구두는 작은 아버지, 큰 구두는 큰 아버지였는데 어떤 날은 백구두도 있었어요. 내 친아버지는 인천의 염전 지주로 소문난 부자였답니다. 열여섯 살에 소실로 들어온 어머니는 다음해에 만삭으로 남편과 사별했습니다. 우린 졸지에 과부와 유복자가 되었는데, 큰어머니는 장성한 세 아들을 시켜 우리를 내쫓았지요. 어머닌 퇴기였던 외할머니의 어깨 너머로 배운 장고와 육자배기를 밑천으로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젖먹이를 안잠자기에게 숨기고 기생의 길로 들어갔지요. 그러나 젖이 불을 때면 없어지는 기생을 누가 좋아했겠습니까. 이곳저곳을 쫓겨다니다보니 소문만 나빠져 큰 술집에선 받아주질 않았습니다. 안잠자기 말로는 험한 뱃사람들의 단골인 부두 술집에서도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내가 네 살이었던 겨울 새벽에 어머닌 어느 뱃사람의 말을 듣고 강화 뱃길을 건너 개풍 역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배천 온천으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겨울 동안 자리를 잡은 어머닌 일주일에 한 번 꼴로 강화로 오셔서 유모에게 양육비를 주셨습니다. 배천에선 수입이 꽤 괜찮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1933년 초봄 어느 날에 근대문학의 스캔들이자 일탈의 돌연변이인 운명의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나는 짧은 전율을 느끼다가 눈치도 없이 그의 말허리를 잘라버렸다.
   “그럼 자당께서 바로...”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객쩍은 맛에 조금 남은 소주를 잔에 나누며 속으로는 부디 노인의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소원했다.
   “혼자 취하여 진양조로 읊었군요. 지루한 줄도 모르고... 죄송했습니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 피곤하시지만 않다면 부디 계속 들려주십시오. 제가 알기론 ‘봉별기’에는 낳은 딸이 죽은 걸로 되어 있는데요.”
   함부로 주인공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는 다시 20세기 초반으로 돌아갔다.
   “없는 딸은 죽일 수 있지만, 있는 아들은 죽일 수 없었지요. 더구나 자식이 있다면 화류계 생활은 끝장나는 거예요. 이상(李箱)은 약속대로 경산부(經産婦) 이전의 과거를 전혀 묻지 않았고 어머니 또한 우리 모자에 관한 그 어떤 것도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지요. 아무튼 두 분은 후세의 평자들이 일컫듯 황음(荒淫)과 일탈(逸脫)의 시대를 열어갑니다. 차도가 좀 나아진 이상은 오월 말경에 서울로 올라갑니다. 어머니도 유월에 배천을 정리하고 강화로 들렀다가 7월 초에 말로만 듣던 경성으로 가게 됩니다. 잘 아실 테지만 그 무렵 이상은 청진동 조선광무소 아래층을 계약하고 칠월 열나흘에 다방을 개업했습니다. 후세에 금홍(錦紅)이가 다방 마담으로 있었다는 건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당시의 다방 허가권자는 경찰서장이었는데 술집이 아닌 끽다점에서는 마담을 둘 수가 없었지요. 명치제과나 낙랑파라도 마찬가지였어요. 어머니의 역할은 명월관이나 식도원의 기생이라면 몰라도 다방에서 수족이 묶인 얼굴 마담 역은 생리적으로 맞질 않았지요. 더우기 어머닌 이상에게 인생을 걸어 보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했어요. 단지 이상을 따라 서울로 간 것은 그의 명성을 발판으로 하여 적당한 요정의 기생이 되어 모던뽀이의 반열에 어울리는 것이었답니다. 그러나 어머닌 어중간한 생활에 곧 싫증을 느끼고 제비다방과는 별도로 독자적 영역을 개척했는데 그건 어쩌면 타당성 있는 생존 방식이었어요. 교육을 받지 못한 강화 기생의 딸로써 장차 모자가 살아남기 위한 처신은 인생의 고통을 늘 임상 실험하는 이상(李箱)의 아방가르드적 이단(異端)일 수는 없었지요. 과연 어머니가 할 수 있었던 게 무엇이었을까요. 후세의 어떤 이는 권순옥이나 변동림처럼 억척스러워야 하는데 질곡을 견뎌내지 못하고 중간에 사라진 금홍이를 아쉬워합디다. 어머닌 금홍이의 역할을 충분히 했어요. 금홍인 금홍일 뿐, 그 이상의 기대는 이상의 말대로 시공을 어기는 ‘이상한 가역반응’일 뿐이지요. 이상의 애인이 술장사를 하는데 남정네들에게 안 팔고 어디 누구에게다 팔까요. 어머닌 타고난 사교성과 마당발로 제 분수에 맞는 역할에 최선을 다 했어요. 어머닌 우선 이상의 문단 친구들에게 전방위적 로비를 벌입니다. 신문사, 출판사를 비롯한 글쟁이들은 당시엔 술집의 일급 고객들이었거든요. 제비다방 뒷골목에 붙은 사랑방은 어머니가 영업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지요. 다방에서 종일 차를 팔아봐야 오 원 안팎이지만 뒷방에선 서너 명만 모이면 이십 원 매상은 올랐답니다. 이상은 구보(仇甫)와 혹은 구인회 멤버들과 낙랑파라로, 엔젤카페로, 성북동으로 쉴 새 없이 쏘다녔죠. 아시다시피 장부가 외출 중에 노자 돈이 마르면 기가 죽어요. 어머닌 이상에게 용돈을 주어 내보냈지요. 이상은 ‘날개’에서 보호 본능적 자의식의 과잉을 일부러 생산했어요. 작품으로 구상할 농염한 여인상의 이미지를 떠내면서도 도덕적 의무를 강요하는 지독한 이기, 공황과 파산의 정신을 ‘다다’라는 전가의 보도로 그만의 비극인 양 합리화 시켰어요. 참으로 무책임했지요. 후세의 어떤 이는 그걸 같잖게도 조롱 정신에 담긴 비극성이라 하더군요. 무슨 도저한 미완성이라나, 절망적 단막의 초상이라나, 별 해괴한 단어를 동원하여 보호막을 구축하더군요. 인간은 누구에게나 은밀한 시선을 즐기려는 내제된 욕망을 가집니다. 관음의 즐거움은 어디까지일까요. 관능과 이성의 변증법적 통합은 가능할까요. 이상은 자기승화의 마지노선을 포기해버렸습니다. 관음을 빙자한 성도착증의 환자, 절제라는 이름의 그물망으로 반드시 걸러야하는 마지막 존재의 자존을 버겁다는 이유로 그물코를 뚫어버린 사나이, 대책도 없이 저지른 일탈을 문단예술이라는 제목을 달아 떠맡은 후세, 괜스레 기행의 대열에 끼여 이상의 후광에 묻어가려는 같잖은 족속들, 난 통틀어 이상을 간단하게 판단했어요. 그는 본태성 자기분열증 환자였어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직 금홍이의 당위성을 방어하는 논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절대의 지지자들이 이상의 편에 서서, 이상의 변형 코드에 중독되어, 솔직히 그를 극찬하여 천재가 아닌 우리들 범부를 합리화시켜 그 반대급부를 묵시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던가! 그에 비해 금홍이는 현실에 적응하는 사실주의적 당당함을 가감 없이 발휘하며 끈적끈적하게 묻은 인정의 앙금을 여실하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기형은 천재와는 달라요. 그렇지만 어머니는 내심 이상을 존경했습니다. 경제적으론 무능했지만 일개 기생이 불세출의 문학가와 삼 년을 같이 살았거든요. 사생아인 나에게 어머니는 이상의 ‘상(箱)’자와 금홍이의 ‘금(錦)’자를 주셨습니다. 철원 안협에서 어머니의 편지를 읽은 상허 선생은 그날로 제자가 근무 한다는 관청의 호적계로 전보를 쳤습니다. 나에게는 별도의 편지를 쥐어 주시고는 그 큰 눈에 가득 눈물을 담았습니다. 나는 보름 만에 호적초본을 들고 집대문을 밀었어요. 누워 말문을 닫은 어머니의 손에다 김상금(金箱錦)이라는 그 민적을 말아서 꼭 쥐게 하였습니다. 어머닌 이튿날 입관할 때까지 그걸 놓지 않았습니다.”
   방죽 아래 들길에서 자동차 경적이 울렸다. 나와 비슷한 동년배 한 사람이 내 곁으로 오더니 깍듯한 인사를 했다. 내가 덥석 그들의 손을 잡았을 때 들릴 듯 말 듯한 약한 장단이 하늬바람을 타고 왔다. 육자배기 장단이었다. 나는 그들 부자의 차가 희미한 점이 되어 노을에 묻힐 때까지 방죽에 서 있었다. 차츰 금홍이의 장구소리도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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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1 멈춤봉 17-03-03 22:03 0  
세상사 코너..너무 목마른 갈증유발에 올립니다. 저작권 침해나 문제야기시 책임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13 물수 17-03-03 22:33 0  
이상 ᆢ 문학적 인간인가 아님 현재를부정한 그저그런 말잘하는 나부랭인가 ? 윗글에도 조금의 내용을 다듬질한 거친부분들이 있듯이 그는 문학 ? 또는 예술 이란 가면으로 죽을때까지 주변을 끝없이 혼란하게한 그런 시덥쟎은 인물ᆢ 누군들 심중없는글로 타인을 희롱수도 있는데 그는 그의잣대로 주윌희롱하고 때로는 적당히 기만했을뿐 문학은 때로는 하챦은것 내면을 희롱당하고싶은것ᆢ
41 지인이아빠 17-03-04 17:04 0  
이상 .. 확신이 서 지는 않지만,,천재로 보이고,,, 따라 살고픈 자극적인 퇴폐적 인간으로도 보이건만,,, 이를 탓하기에 주정뱅이 신선처럼 고상해 보이는 ,,, 지금의 생활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는 인물,,, 예전 재밌게 읽던 책속의 글체 탓에 가슴이 찌릿 찌릿 하게 울려지며, 묻혀진 추억이 살짝 살짝 올라왔다 내려 갔다 하네요. 오늘 저녁은 서점에 들러서 이상의 책 한권 찾아 봐야 겠습니다. 추억이 참 반갑네요.ㅎ
1 일몽 17-03-04 18:39 0  
어찌보면 게으름은 인간의 본능이지요. 살려면 근면할수밖에 없고, 타인의 게으름을 시기하여 타인을 탓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개해주신 책은 조만간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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