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누는 게시판입니다. |
▶주문받은 막걸리인듯
▶우리는 통이 없어 생수통에 한통
산청ic에서 빠져나와 네비기 인도하는 데로 달려간다
밤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답답한데 꾸불데는 산고개길이 나중에 밤머리재라는것을 알았다
집결지는 내원사에서도 2.5km를 더 들어가야하는 산속에 위치하고 있었다
도착하니 이미 많은 분들이 도착하여 계신다
그사이 아이들도 더욱 성장해있고 항상 만나면 너무 반갑다
발전님 저녁 여전히 등갈비 열심히 굽는 봉사해주시고 이번엔 조경지대님의 아드님 동현이까지 열심히 등갈비 굽는데 보조를 맡았다
서로의 이야기꽃을 피우며 그렇게 밤은 깊어갔다
▶내원리 펜션 도착
<이틀째>
지리산자락에 간다고 하기에 산줄기를 검색해보니 내원리는 지난 60년대까지는 이 내원골이 천왕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였다. 내원골에서 순두류로 넘어간 뒤 천왕봉으로 올랐다. 그리고 써레봉-국수봉에서 구곡산으로 이어지는 황금능선이 있는 곳이어서 몇년전부터 마음속에 담아오던 황금능선을 타볼기회가 생겨 좋아라하고 있었는데 래프팅을 간다는 것이다
래프팅도 한번도 해본적이 없기에 래프팅과 황금능선 사이에 갈등을 하다가 처음으로 우리 가족이 모두 참석한 힘든 기회기에 황금능선은 다음에 다시 한번 오기로 하고 래프팅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그래도 너무 아쉬어 두시간 주변을 돌아보기로 하고 펜션을 나섰다
▶펜션집 앞마당 곶감을 말리는 덕장(산청곶감이 무지 유명)
▶ 펜션옆에 밍크고래님고 조경지대님
우리가 묵었던 펜션이 끝인줄 알았건만 한참을 올라가도 중간중간에 민가와 펜션이 있다
20여분 올라가니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할머니가 잡혔다는 안내원 마을이다
안내원마을까지 차량이 올라갈수 있고 그 이후로도 한참 임도로 이어졌지만 휀스로 들어가지 못하게 닫혀있다
▶주위에는 이렇게 양봉을 많이 한다
▶사위질빵
안내원마을에 도착하니 민가 아지트라는 안내현판이 서있다
책이니 드라마 그리고 지리산을 산행할때면 등장하는 빨치산
여기가 마지막으로 1963년 종지부를 찍었던 정순덕 할머니가 숨어살았던 곳이라 한다
▶민가 아지트 안내판
<인터넷 퍼온글: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C2NS&articleno=18315406&admin=&refequery=%EF%A7%8D%EF%BF%BD%EF%BF%BD%EF%A7%8D%EF%BF%BD+%E9%8D%AE%E2%91%A5%EF%BF%BD%EF%BF%BD%EF%BF%BD+%EF%BF%BD%EF%BF%BD%EF%BF%BD%EF%BF%BD%EF%BF%BD#ajax_history_home>
마지막 빨치산 고 정순덕의 진술기록.
나는 1933년 6월20일(음력) 아버지 정주삼씨와 어머니 진도원씨의
1남4녀 가운데 둘째 딸로 경남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에서 태어났다.
우리 마을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산이 마주 닿는 곳.
해발 800m 하늘아래 첫동네로 9가구가 살던 곳이다.
아버지는 평범한 촌부, 어머니는 전형적인 시골 아낙네.
나 역시 여느 산골 아이들과 다름없이 자랐으나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선머슴처럼 일했다.
평온했던 우리 마을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내 나이가 열 다섯살 때이던 해인 1949년 부터였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말들이 들려오더니만
어느날 반란군들이라는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의외로 거칠거나 험악하게 굴지 않았다.
우리집에서도 밥을 해먹거나 해달라며 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다 그해 봄이던가?
안내원 마을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라는 소개령.
반란군을 소탕한다며 산 아래로 대피하라는 명령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마을 사람들
조상 대대로 살던 동네에서 쫓겨났다.
우리집은 면소재지의 방 한칸에서 살았다.
다행히 그곳 대하리에 고모집이 있었기 때문.
하루 아침에 황망한 꼴을 당한 우리 가족
암소 두마리로 고모네 논을 부치며 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1950년 5월 만 16 나이로 결혼했다.
근처 마을에 성씨 집안의 장남 성석조씨가 나의 남편,
그당시 처음 만난 17살 남편에게 시집갈 수 밖에 없었다.
일찍 시집을 가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흉년이 3년 겹친 탓.
입이라도 하나 덜어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
남편은 나를 참으로 따뜻이 대해 주었다.
남편은 내가 시집가기 몇해 전 돌림병으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여의고 농사일을 하면서
3살, 6살, 11살 동생들을 돌보는 외로운 사람.
어른들의 조언도 들을 수 없었던 남편은
어린 나이에 순전히 자신의 판단으로 전쟁 직후
인민군 점령 하에서 몇달 동안 '민족 애국 청년단'
그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부역행위를 했다.
이것이 남편뿐 아니라 내 인생을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
인민군은 얼마 못가 철수하고 나자 남편은 빨갱이로 몰렸다.
남편은 당분간 산에 들어가 있어야겠다며 지리산으로 떠났다.
남편이 산으로 들어간 뒤 국군과 경찰이 잇따라 마을로 들어왔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불을 보듯 자명했다.
"빨갱이 남편을 찾아오라."는 위협과 폭행
시동생들을 맡았던 나는 변명 한번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토벌대가 찾아와 총 개머리판과 몽둥이로
어깨가 빠지는 등 온몸에 성한 곳이 없을 만큼 마구 때렸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나는 두려움과 고통을 이길 수 없었다.
1950년 11월 근처에 살던 숙모에게 몸을 피해야겠다고 전한 뒤
약간의 식량을 이고 일주일간 피신했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남편을 찾아 잠시 몸을 피하려고 들어간 지리산 골짜기에서 13년.
빨치산이란 이름으로 생활을 하게 될 줄은
나 자신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빨치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얼마 후 취사부에 들어갔다.
거기서 꿈에 그리던 남편을 만났고 입산이 죄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지만 시간이 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날, 1952년 1월 토벌대의 2차 대공세(일명 대성골 천불사건)
지리산에 흩어져 있던 빨치산들이 토벌대 공세에 쫓겨 대성골로 몰려왔다.
토끼몰이 하듯 우리를 몰아넣은 토벌대는 B2 폭격기로 비오듯 포격을 시작
2주간 계속된 공격으로 산속은 온통 불바다
대성골의 빨치산들은 거의 사살되거나 잡혔다.
빨치산은 세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총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는다’
당시 나는 엄동설한에 혼자 바위틈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일주일 동안 숨어 지내야 했던 극한 상황에서 이 말을 실감했다.
이 공격에서 나는 살아 남았지만 난리통에 헤어졌던 남편은 죽었다.
그 전까지 밥이나 빨래 허드레일을 하거나 환자간호를 하며 지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정식 전투원이 되었다.
군경 토벌대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희생자가 늘었고 빨치산은 위축되었다.
그 와중에 산간지대 주민들도 토벌대에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또 빨치산 내부에 불만을 품고 토벌대에 자수한 고위 간부들도 있었다.
그들이 토벌대를 데리고 오는 바람에 보급이 끊기고 비트가 기습당했다.
날이 갈수록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점점 좁아졌다.
정전 이듬해인 1954년 모두 7명 남았던 여자 빨치산.
그 중 한명이 귀순하며 나머지 6명도 신분이 알려졌다.
그후로는 주변의 친척들까지 경찰에 시달렸다.
1954년 말 이은조와 이홍희 나 3인의 여성 빨치산.
이때부터 셋이서 최후의 빨치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추운 겨울을 지리산 속에서 넘기기란 쉽지 않았다.
1955년 한해 동안 전북 장수와 무주 덕유산 기백산 월봉산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살아남기 위해 옮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가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한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1956년 지리산으로 돌아간 우리는 토벌군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고립
식량을 얻기 위해 친척집을 찾고싶어도
친척에게 화가 될까 두려워 갈 수 없었다.
1960년 정부의 통제가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과거 협조적이던 사람들에게 조금씩 도움 받았다.
하지만, 1961년 겨울 매복 나온 토벌대의 기습으로
총격전 도중에 여자 빨치산 동료였던 이은조를 잃었고
언제 토벌대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계속됐다.
1963년, 경찰은 우리의 정보원이던 나의 먼친척을 위협하고 회유
11월에 접선할 정보를 알고 치밀한 작전을 세우고 우리를 기다렸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 집에 들렀던 우리는 경찰에게 포위되었다.
동료 이홍희는 사살 당했고 나는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로써 지리산의 빨치산은 모두 사라졌고
나의 13년 지리산 속에서의 생활도 끝났다.
===================================================
고 정순덕의 생애
1933년 경남 산청군 삼장면 매월리에서 출생.
1950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출신 성석조씨와 열여섯에 결혼.
그해 9월 남편을 찾아 지리산에 입산.
1951년∼1953년 지리산 진양군 유격대 편입.
남편 마지막으로 만남.(1952년 남편 전사 확인)
노영호 부대에 편입 덕유산으로 옮김(1953년)
1963년 13년간 지리산 빨치산 활동 중 지리산 내원골에서 마지막 빨치산으로 체포 됨.
산청경찰서 경찰과의 총격 중 다리에 총상을 입고 오른쪽 다리 절단.
무기징역 선고받고 대구, 공주, 대전교도소 등에서 23년간 투옥.
1985년 8.15 특사로 가석방된 뒤 음성 꽃동네에서 생활
1988년∼1995년 자립을 위해 꽃동네에서 나옴.
부산 가죽공장, 서울 가구공장, 구로동 양복걸이 공장 등지에서 노동하며 삶.
1995년 비전향장기수들의 거처인 낙성대 ‘만남의 집’에 정착.
1999년 뇌출혈로 쓰러져 뇌수술을 받고 왼쪽 마비. 인천 나사렛 한방병원에서 한방치료.
2000년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요구 했으나 당국의 거부로 무산.
2001년 ‘전향 무효’ 선언하며 2차 송환 촉구.
2004년4월 1일 향년 70세로 별세.
▶노루오좀
▶올라갈때까지만 해도 맑던 날씨가 안개속으로 변하였다
임도가 끝나는 곳에서 갈림길이 나타난다
아마 좌측으로 가면 국수봉으로 갈수 있고 곧바로 오르면 천황봉으로 갈수 있을것 같은 길목에서 더이상 진행을 하지 못하고 2시간 정도의 아침 산책길로 만족하고 숙소로 돌아오니 아침 식사중이다
식사가 끝나고 9시 30분이 지나 오늘의 하이라이트경호강 래프팅을 하러가기위해 산청읍에 있는 사람과 바다 레저업체에 갈려면 어제밤 힘들게 넘었던 밤머리재를 넘어가야 한다니 아찔하지만 그래도 밤길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라 여기고 집으로 귀가할때는 좀더 돌아가더라도 단성ic로 나가리라
준비운동하고 가이드의 지도하에 1팀(팀장은 삼여님), 2팀(조장은 꽃다지님) 출발여 하나둘 구령도 붙여가면서 도중에 1팀과 2팀 어린아이마냥 물싸움도 벌이고 물놀이도 즐기고....2팀 가이드는 심각한 얼굴로 우리팀보고 피가 난다고 하여 놀라는 틈을 이용하여 무지막지 하게 우리팀에게 물세례를 퍼부었고 발전님은 열정이 넘쳐서 보트위에서 너무 열심히 엉덩이를 굴리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몸무게가 가장 가벼운 우리팀 혁호는 붕날아서 물속으로 첨범 빠지는 사태도 발생하고 다리까지 먼저 도착하기 게임을 하여 지는 팀이 아이스크림 사주기로 하였는데 처음에 우리팀이 온전력을 쏟아 전진하다가 너무 힘이 들어서 그냥 포기하고 아이스크림 사주고 말자고 의논하여 낭창하게 가고 있는데 꽃다지님팀들은 전력질주 아예 꽃다지님은 서서 노를 저으셔서 결국 우리팀을 이겨서 승리감에 젖어있는 모습에 우리팀은 한참을 웃어야 햇다
2시간이 지나자 약간 저질체력이 드러나는 바다물사랑님은 나이먹은 사람 욕보인다나 어쩐다나하며...투덜거리는 바다물사랑님을 보며 나는 속으로 그짝이 나이타령 하시믄 허거참님은 우짜라고.....
2시간여 래프팅하고 나니 허기가 져서 온천이고 뭐시고 간에 모두 생각나는 것은 먹고싶은것이 왜그리도 많은지 10분만에 모두 산청온천에서 목욕을 끝내고 다시 밤머리재를 넘어서 펜션에 돌아와 삶아놓는 백숙을 허겁지겁 먹는다
저녁에는 피곤하여 일찍 쿨쿨 꿈나라로....
▶삼여님팀과 꽃다지님팀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