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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414년에 장수왕이 만주 집안현에 세운 비석으로 그의 부왕인 광개토대왕의 공적을 기록하고 있다. 높이 6.39m, 너비 1.35m∼2m의 화산암에 1755자가 새겨진 동양 최대 크기. 여기에는 고구려를 천하사방의 중심으로 보는 당당하고 주체적인 고구려인들의 세계관이 나타나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정식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4세기말 ∼ 5세기 초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유물이다.
호우총와 광개토왕비의 글씨체 비교

古隸의 비교
이제 그 미스테리를 짐작하시겠지요. 호우총의 청동호우와 광개토왕비의 고예를-
기가 막히는 비교입니다.
광개토왕의 막강한 세력에 내물왕이 뒷걸음 쳐야 했던 이유를, 내물왕이 볼모를 제공해야했던 상황을, 실성이 인질로 갔던 이유를, 실성의 구데타 실세는 고구려였다는 것을, 눌지왕이 인질로 간 두 동생 미사흔(왜국)과 복호(고구려)를 구출한 정황을, 최소 10개의 호우 중 복호가 입수한 것이 바로-호우십(壺杅十)이겠지요.
마치 ‘다빈치 코드’처럼 엮여있는 역사적 사건을 화가이자 수필가인 김용준은 풍부한 사서(史書)와 고예(古隸)의 식견으로 풀어갑니다. 거기에다 고완을 보는 탁월한 상고적 감각에 추리력을 접목시켜 술술 풀어가는 김용준의 사적 안목에 일종의 전율마저 느끼게 됩니다. 기대와 긴장감의 연속인 그의 호우 코드는 런던 박물관에서 다보탑 석사자등을 찾듯, 종래엔 숨을 고르는 행복한 평정으로 안도합니다.
김용준은 그의 수필집 '근원수필' 중 ‘광개토왕(廣開土王) 호우(壺杅)에 대하여’에서 그 해답을 제시합니다.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古隸의 정신을 높은 품격으로 여기던 완당 선생은 24세에 그의 아버지의 燕行에 쫓아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 같은 당대 홍유(鴻儒)들을 만나 금석학 서법에 관한 오의(奧義)를 공부하고 우리 조선에 글씨가 없음을 개탄해 마지않았는데 그가 서거한 지 불과 30여 년에 고구려의 고도 통구(通溝)에 우뚝 솟은 광개토왕비가 1천6백여 년을 두고 황폐한 고도를 내려다보며 그 웅위기굴(雄偉崎?)한 수천 자의 고예(古隸)를 가슴에 품은 채 잡초 우거진 가운데 숨어 있었던 줄을 누가 알았으랴. 더구나 그 후 6,70년이 다 못된 때에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 고예로 씌어진 동조(銅造) 광개토왕 호우가 발견될 줄을 감히 짐작이나 했겠는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王碑)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비수(碑首)나 비부(碑趺)의 수식도 없이 고구려 사람의 진취적 기상과 독창적 정신을 웅변으로 말하는 이 비는 수십 척 높이의 한 덩어리의 자연석 그대로다. 후한이나 수, 당 이후 오늘날까지 동양에는 이런 형제(形制)의 비는 없었다.
비라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원수(圓首)나 규수(圭首) 혹은 반리(蟠?)의 비수(碑首)와 천공(穿孔) 비신구부석(碑身龜趺石) 등이요, 비신(碑身)은 으레 사각으로 다듬는 것이 항례다.
무두무미(無頭無尾)한 한 덩어리의 돌이 의기충천하는 기상으로 홀연히 용립(聳立)한 이렇게 무모한 비를 일찍이 경험한 사람이 있을까! 무명소졸(無名小卒)의 묘표(墓標))라면 또 모르겠거니와 용감하기 비할 곳 없는 고구려사람 그 중에서도 제왕, 제왕 중에서도 전무후무한 영주인 광개토왕-이 분의 기적비(紀積碑))가 포효하는 사자처럼 아무렇게나 생긴 돌로 우뚝 세워졌다는 것은 고구려의 감각이 아니고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김용준은 ‘미는 곧 힘이다’라고 말한다. 힘이 없는 곳에 미가 없고, 미의 이상은 글씨로도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시대는 비록 분예가 생긴 훨씬 뒤의 진(晋)대라 할지라도 이 석문의 패기와 치졸웅혼(稚拙雄渾)한 맛은 후한비와는 그 유를 달리한다. 공주비, 조전비, 예기비처럼 염려하다거나 간경한 맛은 약에 쓸려도 찾을 수 없다.
혹자는 호태왕비를 분서라하고, 분예이면서 고예에 가깝다고 하나 그것이 파별로 분서라 할지 모르나 심한 만환으로 인해 분예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
(자양과 결구, 점획이 모두 같다. 國岡上廣開土境이 동일하다. 비문의 境字와 호우의 地字는 같은 뜻이다. 호태왕은 호왕의 극존칭이니 같다. 開字의 口形 모양도 같다.)
한 치 평방밖에 안 되는 호우 바닥에 명기된 16자의 글씨는 실로 웅대한 기상이다. 일점일획의 파별이 없고 글자마다 우레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파별 같은 인상을 준다고 치더라도 누가 이것을 분예에 가깝다고 할 것인가. 고하고 졸하며 위하고 기하다. 그러니 이 두 금석문은 동일인의 필적이라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사서를 보자. 호태왕 비문에는 ‘以甲寅年九月甘九日乙酉遷就山陵 於是立碑銘記勳積)以示後世焉(갑인년 9월 29일 을유일에 산릉으로 옮겨가니 이에 비를 세우고 기록을 새겨 그 훌륭한 업적을 후세에 보이고자 함이니라)’이란 대문이 나오는데 호우의 乙卯年國剛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 기년명으로 보아 이 호우가 주조된 것은 호태왕천장 익년에 해당한다. 또 글씨의 자양 결구의 일점일획이 모조리 똑같은 것을 보아 이 두 금석문의 필자는 동일인임에 틀림없고 당시의 명망 높은 서가임이 확실하다. 여기서 근원 선생은 확언한다. ‘고증이 앞서기 전에 나는 대담하게 말하노니 이것이 동일인의 글씨라는 것은 나의 직관의 힘이 틀릴 리가 없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어찌하여 고구려의 호우가 그때의 상대 세력의 나라인 신라에 와서 묻혔느냐?’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근원의 해답은 이러하다.
신라 내물왕 37년 임진, 공원 392 고구려 광개토왕 2년에 고구려의 강대한 세력으로 인해 신라는 이손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양보한다. 실성은 그를 인질로 바치는 내물왕에게 원심을 품게 된다. 그 후 10년을 와신상담하던 실성이 우여곡절로 환국하고서는 내물왕의 세 아들이 어린 것을 틈타 왕좌에 오르게 된다. 즉위하자 곧 실성왕의 보복이 시작되는데, 먼저 왜국의 트집으로 내물왕의 열 살의 셋째 아들 미사흔을 왜에 인질로 보내고, 그 후 11년 만에 둘째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버린다. 그해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승하한다. 그 후 3년 만인 장수왕 2년 갑인에 호태왕의 능을 통구로 천장한다. 그 익년인 을묘에 호우를 주출하고 그 후 4년 만인 신라 눌지왕 2년 즉 고구려 장수왕 6년 공원 418에 복호는 인질로 간 지 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고 왜국 일본으로 갔던 미사흔도 돌아온다.
이후 실성왕은 눌지왕이 된 내물왕의 큰아들에게 쫓겨난다. 권좌에 눈이 먼 실성왕은 내물왕의 큰아들마저 려인과 결탁하여 고구려로 보내나 눌지의 신체가 워낙 비범함에 려인은 그 밀약을 되려 알려주게 된다. 이에 눌지는 귀국하여 군사를 도모하여 실성왕을 치고 왕좌에 오른다.
이어 눌지왕은 예의 인질로 간 두 동생을 구출하는데, 그 작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신하가 바로 박제상이다. 사기와 유사엔 이렇게 전한다.
두 왕제가 그리워 비탄에 빠진 눌지왕을 보고, 삽랑군 태수로 있던 박제상은 자원하여 고구려로 인질이 되어 간 복호를 구하러 떠난다. 실패하면 국가의 위신이 떨어지게 되고 더불어 광개토왕 이후의 영토를 넓히는 고구려의 국책에 걸려들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박제상은 당당하게 고구려의 장수왕을 만나 일촌설의 기지로 복호를 구출하여 돌아오게 된다. 이어 제상은 왜국으로 가서 사모의 작전으로 왜왕의 환심을 산 후 미사흔과 낚시를 한다는 구실로 바다로 나가 탈출시킨다. 박제상은 왜왕 면전에서 당당하게 ‘신은 계림의 신이요 왜왕의 신이 아니라, 군왕의 명을 좇아 왕제를 도망시켰노라’ 하고 왜왕의 중록을 거절하고 화형을 당한다.
눌지왕은 충신 박제상에게 대아찬의 직위를 추증하고 유족에게 후사를 내리고, 제상의 둘째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한다.
이 두 왕자의 이야기 중 우리는 복호에 관해 유추할 수 있다. 복호가 고구려에서 돌아온 것은 신라 눌지왕 2년(공원 418)이다. 즉 호태왕릉을 천장한 해로부터 5년이고 호우를 만든 해로부터 4년 만이다. 호우명에 ‘을묘년’, ‘호우십’의 글자는 호태왕의 위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호우 열을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를 복호가 왕실로부터 얻어 보관하다가 고국으로 가져온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 호우가 나온 경주 고분 호우총은 필시 복호의 무덤이 분명할 것이다.
호태왕 비문의 입비년도는 갑인년(공원 414)이라 적혀있지만, 호우를 만든 을묘년(공원415)에 입비하였는지도 모른다. 입비란 반드시 장례와 동시에 하는 것이 아니요, 추후로 세우는 것이 관례이다. 서체로 보아 동일인의 필적이고 기념호우를 을묘년에 만들었다면 입비와 동시에 이 청동호우를 주출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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