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늦은 저녁에 금병의숙을 나온 유정은 속이 허전했다. 서낭당 뒷길에 붙은 술막엔 이미 영수 패가 거쳐갔는지 술청이 한적했다. 열사흘 달은 어머니 품처럼 넉넉한데, 턱도아니게 유정의 아랫도리는 대책없이 저려왔다. 코다리 찌개에 얼큰한 유정은 천희가 있는 술막 아랫채로 갔다. 세상 모르고 잠이 든 천희는 돌쟁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아이와 승강이를 벌이다가 기어이 한 쪽 젖탱이를 차지했다. 벌써 보름 째라 아이에게도 정이 들었다. 유정은 강원도 아리랑을 흥얼거리며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나 잤을까. 물이 켜서 눈을 떴다. 아직도 목젖엔 강원도 아리랑이 실려 있었다. "내일 갈지 모래 갈지 내 모르는데~" 유정이 윗목의 숭늉을 찾으며 읊조리자 낮은 진양조가 후렴을 이었다. "옥씨기이 강낭이는 심어 뭐하리~" 잠이 덜 깬 유정은 부스스 천희를 내려다 보았다. 매운 눈을 비비자 새파란 권련 연기 위로 숭늉 사발이 떠 있고, 호얏불 뒤로 금전판 사내가 돌쟁이를 안고 있었다. 천희는 아직 꿈속이고 밤은 열두 점인데, 처마에 걸린 달이 사내의 빈 삼태기를 어슴푸레 비추었다. "물골도 인자 말짱 텃어. 고자리 쑤시듯 성한 데가 읎어.... 날 새면 눈들이 많으니 인자 가보시게나."
[주1]금병의숙(錦屛義塾):유정이 1931년 고향 실레마을에서 문맹퇴치운동으로 시작한 야학당을 1932년에 당국의 인가를 받아 설립한 간이학교. 조카 김영수(金永壽)와 그의 동료 조명희(趙明熙)가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문맹퇴치 뿐만 아니라 농우회, 부인회, 노인회 등을 조직하여 마을 공동자금으로 저리 금융도 운영하며 생필품의 염가 공급, 공동경작 등으로 공동체 생활을 체득케 함. 1933년까지 운영되었으나 유정과 김영수의 상경으로 조명희에게 인계됨. [주2]코다리 찌개:강원도 지방에서 명태를 코 꿰어 눅눅하게 말려 조리한 찌개로 술안주와 술국으로 유명함. [주3]들병이:주로 금전판(금광) 근처에서 술과 몸을 파는 남편있는 아낙들, 이동식 작부. [주4]고자리:구더기, 애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