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우에 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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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우에 굶다

1 경주월드 6 876 2009.04.2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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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성건동 노인회 무료 급식소]
 
 
   곡우 때에 가물면 석 자가 마른다고 했는데, 다행히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옛날엔 곡우날 비 오면 굶어 죽지는 않는다고 했다. 잠언과 속담은 인간이 이룬 최대의 업적이다. 그러나 그 업적에도 숱한 시행착오가 있었으리라는 걸 오늘에사 알았다.
   자치단체에서 마을마다 운영하는 무료급식소가 있는데 전부터 그곳을 꼭 한번 체험해보고 싶었다. 마침 부인이 그 급식소에서 봉사를 하고 있는 친구가 왔기에 함께 가기로 했다.
   다행히(?) 친구도 대머리라 무료 급식소 입장은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다. 급식소는 바깥의 긴 복도와 두 칸의 방이 전부였는데, 우린 할아버지들만 옹기종기 모여 계시는 방으로 들어갔다. 두리번거리다가 빈 자리를 잡아 앉았다. 아랫목엔 여든이 넘는 어르신들이 점잔히 앉아계시고, 일흔 남짓한 한 노인이 상에다 수저를 차리는 중이었는데 우릴 힐끔 쳐다보며 꽤나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전후좌우를 살펴보니 아뿔싸, 우리가 앉은 위치가 그 여든자리 복판이었다. 내가 자릴 잘못 잡은 걸 혹실히 알아차린 건 그 수저를 차리던 노인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고 난 다음이었다. 그 수저 노인이 두 번이나 눈치를 주었는데도, 예순을 겨우 넘긴 우리는 끈질기게도 그 좌석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군대 '빳다' 이후 남에게 엉덩이를 맞아본 적이 없었는지라 항의라도 해야겠다싶어, 적당한 표정관리를 한 다음 뒤를 돌아다 봤다. 어헉! 이 무슨 변고인가! 뒤엔 늘 라디오를 들고 다니시는 내 아버지 친구이신, 일명 '트란지스타 영감'께서 떡하니 나를 노려보고 계시는 것이었다. 나는 일등병 점호 복창하듯이 부동자세로 섰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비도 오는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그간 기체만강..." 어쩌구 저쩌구, 잔뜩 주눅이 들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지껄여댔다.
   "자네, 아무게 아들이지?"
   "예, 그렇습니다!"
   "아직 살아있나?"
   "예, 살아계십니다."
   함께 온 친구는 합바지 방귀 새듯이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잘 하거래이. 살아 생전에."
   "예, 알겠습니다."
   "밥은 반 그릇만, 멸치는 빼고!"
   "예?"
   "치근이 물러서 몬 씹는다카이."
   나는 다시 일등병 시절로 돌아가 전후좌우로 눈알을 굴려보았다.
   수저노인이 식판을 들어다 아랫목으로 배달하면서 내게 세번째로 눈치를 주었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심호흡을 한번하고 생각하니, 아하! 그곳이 지정석이었구나. 언감생심 내가 세번째 자리에 앉아 버텼다니!
   부지런히 그 방에다 식판을 갖다 날랐다. 멸치는 빼고...
   13시 30분,
   주방에서 나오는 큰 소리의 생방송,
   "급식을 마칩니다. 식판은 원위치로 갖다 주세요."
   나는 트란지스타 영감이 수저를 놓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스무 개의 식판을 거둬 날랐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뿌듯한 기분으로 모처럼 효도라도 하는 양, 마음이 넉넉했는데 그건 그때까지였다.
   나는 트란지스타 영감을 깍듯한 인사로 전송하는 중이었다. 영감의 라디오엔 '가거라 삼팔선아'가 흘러나왔다.
   "그럼, 편히 가십시요."
   영감은 나를 아래위로 훑어 보더니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김가야, 이제 오면 우짜노! 밥 시간이 끝난기라! 개도 일찍 깨야 뜨신 똥을 묵는기라."

 
   굶지 않는다는, 비 오는 곡우날에 친구는 불어터진 짜장면을 신문지로 덮어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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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댓글
1 BlueTang 09-04-20 19:31 0  
행님도, 참! 우찌 그런 일까지 현장체험을 하실려고 생각했을까? ㅎㅎ...... . 혹시 늙어가는게 너무 괴로우신가...... . 아님, 좀 아동스러우신가...... . 댓글 달려고 로긴했는데, 비밀번호가 생각 안나서 식겁했네요. 그래서 저도 늙어가니 뭐 다들 공평하지요. 떡 축제 함 다녀 오셨나요? 이 곳 동경주에서도 대표가 나가있는데, 이 비 그치면 깨끗한 날 골라서 가족과 함 가볼려고요. 글 참, 티없이 좋네요. 여전히 잘 계시지요? 아, 참! 저 하선장입니다요.
1 경주월드 09-04-21 09:20 0  
나는 그냥 '블루'라고 부를테야.
뭐, 나 같은 하릴없는 사람들이 복습하는(실은 80년 전에 '구보'가 원조지만, 외국에선 제임스 조이스의 '볼륨스 데이'가 더 먼저-) 고현학 같은 걸세.
아니, 늙어가는 게 공평하다고라구라? 품질이 문제제.^^
그 영감님이 치매 초기라는 걸 몰랐다면 그날은 참 행복했을 거야.
원문엔 안 썼지만....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제. 계속 붙잡고 서 있었지 뭐, 어쩌겠나.
(자장면 다 불어터진다는 문자는 계속 들어오고...^^)
두 시가 다 되어서야 영감님 자부께서 모셔 가셨지.
가실 때 정신이 약간 돌아오셨는데, 자부에게 이르시길,
"저 사람이 아무게 아들이라고..."
두 분의 뒷모습을 보니, 참 [블루]하더라고...^^(여기서 끊어지네?)
1 경주월드 09-04-21 09:58 0  
'love is blue'라는 곡이 있었제.
블루, 블루 톤, 왜 사람들은 그 색깔을 우울하다고 느낄까...
난 블루가 아주 청량하다고 생각하는데, 티 없이 맑은, 담청 같은 거랄까.
난 무슨 색일까. 블루보다 나은 게 없네.^^
1 허거참 09-04-20 23:40 0  
ㅎㅎㅎ... 로긴하게 만드시네요이~
뭘 굶나.. 했더니 진짜 굶었구려..ㅋㅋ
곡식 귀한 줄 곡우날 깨닳다. 이 말씀이구려..
난 곡우가 돌아오니, 질 좋은 우전차(雨前茶)를 어디 가서 구하나..
요런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
서울 낙원동에 갔다가.. 늙은이들 많은데 놀랐다오..
거의 집합소더만..ㅎ
한 골목에 들어갔더니 뭘 나눠주고 있데요.. 담요, 쌀.. 등
거기 주민이라는 것만 증명하면 준다는데.. 단 늙은이에 한해..
[나도 함 받아볼까 했지만 자격이 안되넹.. 부산시민이 감히..ㅋㅋㅋ]
알아보니.. 모 대기업에서 자선활동이더만요.. 기업 피알이겠지만도..

배가 고파 해장국집에 들어갔더니..
해장국이 2000원.. 헉..
국맛도 좋고 밥맛도 좋고..
쥔아줌마는 연변 아줌마..
영감 하나가 느릿느릿 점심끼니를 힘들게 드시기에..
살짝 돈을 내드리고 왔지라..

나와 걷다가 탑골공원 동문 앞, 리야까行商에서 돋보기 하나 샀는데..이 아줌마도 옌지에서 왔다넹..ㅋㅋ

한번은..
프랑스 빠리에서.. 한 10년전쯤 되나.. 길 가다.. 길게 줄을 섰기에..
뭔가하고 나도 섰는데..알고보니 모짜르트 진혼곡(Requiem) 연주회 표 사려고 길게 늘어선 줄이었지요..
결국 얼떨결에 돈 몇백 프랑 주고 표 사서 잘 듣고 나왔다오.. 그 감동의 연주와 합창을..ㅋㅋ.. 마들렌느 극장이었다오..

줄 서는데 재미가 붙었나..
또 한번은..
역시 빠리의 북부역 앞길을 걷다가.. 뭔 줄이 서있기에..
이번에도 또 끼어들어 섰는데..
내 차례가 가까워와서 앞을 잘 보니.. 무료 급식.. 에구머니나.. ㅋㅋ
무안키도 하고 뭐 재밌기도 하고.. 에라.. 받아먹었는데.. 간단한 점심끼니였던가.. 아 참 저녁끼니였나보네.. 날이 어둑어둑하였으니까..ㅎ
그런대로 먹을만합디다.. ㅎㅎㅎ..

이 호기심病은 평생 아무도 못말릴 겨..! ㅋㅎㅎ

그나저나..
'가거라 삼팔선아..' 가 절묘하구먼이라.. ^^*
1 경주월드 09-04-21 10:36 0  
불어서 굳은 자장면을 젓가락으로 뜨니 그릇만 남고 덩어리가 따라 올라오더라고요.
공원으로 갔지요.
술과 떡 잔치, 축제라는 명목으로 자치단체가 애매하게 지출할 수 항목들, 대다수 시민들이 불만인 잔치도 아닌 야시장의 집합, 소음공해, 쓰레기 산적.... 그래도 난 한번도 항의 안 했어요. 그 맛보라고 주는 공짜 '맛배기 술'에 홀려서...^^
작년에 세운 기록 40차!^^ 일 년에 단 한 번 있는 절호의 기회, 도합 스무 개의 부스를 2회를 돌며 한 잔씩 얻어 마신 진기록입니다.(비록 소줏잔만한 종이컵이지만...^^)
기네스 기록이 별 건가요, 뭐.
(이게 자수 제한이네요...)
1 경주월드 09-04-21 11:12 0  
고현학은 낙원동이 제 격입니다.
원조는 구보의 다옥정(다동, 경성 기분으로...^^) 7번지에서 청진동 해장국 집 뒤에 붙은 이상의 제비 다방을 돌아 화신, 수표교 건너 장곡천 낙랑파라로, 미샤 엘만의 바이올린 곡을 들으며 대한문의 비애를 삼키던 구보 그리고 李箱의 패들...
이게 종일 하릴없는 백수, 제 전공인데...^^
'영감 하나가 느릿느릿 점심끼니를 힘들게 드시기에..살짝 돈을 내드리고 왔지라..'
'서비 형'은 역시 멋쟁이라.^^ 아니 모던뽀이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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