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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둘-2

G 1 1,240 2002.05.08 18:15

4. (죽령 5월 3일)

소백산 자락에 살기에는
나는 아직 준비가 필요하다
내 아이를 양육하는 아버지의 일과
내가 약속한 내 아내의 일
그리고 둥지를 틀 공간도 마련하여야 할 테니

풍기에서 바라보는
연화봉 두솔봉 아래 연봉들은 충분히 높은데도
고래 등 같이 원만하고 부드러운데
그 아래 산맥이 장대히 팔 벌려 내달리고 나면
그 품은 넉넉하여
세상 전부를 담아내도 모자라지 않을 여유가 있나니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너는 지금 여린 찻잎 순 같은 생명들을 키우며
사슴녹각 솜털 같은 은녹색 빛으로 내뿜어 나고 있구나

소백산 자락에 살기에는
나는 아직 준비가 필요하다
아직은 안주치 못하는 내 젊은 혈기를 소진하는 일과
내 영혼이 유영할 자유를 살, 일을 하는 일
소백산 자락에서는 쩨쩨하게 살고 싶지 않아
거침없는 영혼으로 살고 싶어

세상이 만만하고 분별 또한 있다면
저 산은 아이들께 큰 바위 얼굴이 되어 줄 터이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고
나 또한 부족해
아직은 때가 아냐

먼 훗날
영혼이 가난할 때는 찾아와 주세요
지친 영혼 하룻밤 안식할 집 한 칸 마련해 놓을 테니
그래도 시렵거던 내 거처의 문을 두드리세요
벗되어 드릴 테니
아니 물이 되어 드려야 겠구만
아니 바위가 되는 게 좋겠어
어쭙잖은 관심은 나도 질색
그러나 당신이 필요로 한다면
말없이 차 한 잔 되어드리는 건 나도 찬성
사람이 사는 건 적당한 소란스러움이 있어야 하거늘
살아 있음으로 나 또한 많이 적적해 할 거외다

이거 좋은 생각이야
소백산 자락에 살기에는
여기
밤이면 별빛이 맑아 하늘은 창대히 열리고
온갖 신비의 교신들로 가득할 테니
내 미혹의 둔감한 안테나만으로도
정상 천문대를 중계소 삼아
영혼의 불꽃을 우주로 쏘아 보낼 수 있으리이니
emotional technology

소백산 자락에 살기에는
나는 아직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오늘
스쳐 지나며 다만 눈으로 인사할 뿐
내 사랑 가득 담아 다만 눈으로 인사할 뿐


5. (단성→청풍 5월 3일)

산 그림자 지고
푸른 그림자 지고
정적과 고요와 신화의 그림자 지면
거기엔 소멸과 비애와 두려움이 깃드나니

난 아침이 좋아

모두가 떠난 그 허전함과 공허 속으로
아직도 맑다 못해 쨍한 그 대기 속으로
바람처럼 달리며
떠난 자를 아쉬워하다.

모다 들 어딜 갔느뇨
이 청명한 공간에
산과 숲과 물의 정령들만 장난칠 상대 없이
저네들끼리 심심한 유희를 하게하고
내 발걸음만 괜스레 바쁘게 하고서

모다 들 떠났구나

그래, 내가 한바탕 놀아 주마
청풍 마루 언덕에서 장엄한 일몰 뒤에
시시각각 엄숙해지는
시시각각 침울해지는 호수를 위해
거침없는 영혼으로 노랠 부르며
이윽고 달을 띄워 올린다.

헤반주그레 웃는 호수

한줄기 바람을 놓아
간지럼 타는 웃음소릴 들으며
또 다시 발길을 돌린다

난 바람처럼
화살처럼
이 어둠의 대기를 달리고 싶어

- 찾는 이 없어 점점 적막해지는
그래서 원기를 회복해 가는 충주 호반로를 달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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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댓글
G 김 일석 01-11-30 00:00
우두망찰님, 진솔한 향기가 느껴지는 글이군요.....잘 읽었습니다....멋있는 분!! [05/13-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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