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던 시절 가끔 새벽 옅은 잠을 깨우는 먼 기적소리가 들리면 가슴속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아련한 그리움이 피어오르고, 더불어 왠지 모를 설레임이 온몸을 휘감아, 한참을 이불속에서 뒤척이곤 했던 기억이 있다. 어른이 되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깨닫게 된 것이지만 그 설레임은 다름아닌 내 잠재의식속에 깊이 자리잡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아니었나 싶다 또 어른들은 그것을 일러 "역마살(驛馬煞)"이라 한다는 것은 한참을 자란 후에야 알게 되었다.
22,3년쯤 되었을까, 오래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슴속에는 청운이 살아 꿈틀거리던 그 시절 한때 내가 살던 그곳은 농촌 모습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지금은 도심의 한가운데로 변해버려 옛모습을 찾기조차 어렵지만 그때만 해도 집옆 조금 떨어진 곳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큰 수로와 작은 수로가 큰 둑을 경계로 나란히 뻗어서 십리는 족히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맑은 가을날 오후 해가 서쪽으로 약간 기운때쯤 그날도 여느때와 같이 집옆을 흐르는 수로를 따라 동쪽으로 걸어서 5분 거리에 위치한 나만의 POINT에 이르러서는 작은 수로쪽으로 둑아래에 자리잡아 민장대 달랑 하나 던져놓고는 손바닥 크기의 대물(?)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가 챔질 순간을 놓치고는 떡밥만 갈아끼우기를 반복하다 가끔 재수없어 걸려든 잔챙이 붕어 한마리씩 잡아 그물에 담아넣고 다시 생각에 빠져들곤 하다 보니 어느새 기운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면서 내 왼뺨을 비스듬히 비칠 무렵 멀리서 엿장수 가위소리가 바람결에 끊어질듯 이어지며 내가 들어선 길을 따라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무심코 듣고 흘리다가 "이 근처는 동네도 집도 없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영락없는 "황야의 무법자" 모습의 낮선 엿장수 하나가 석양을 등지고 강한 실루엣을 던지며 오른손은 습관적으로 가위를 절거덕거리며 왼손으로는 덜컹거리는 리어카를 밀면서 비에 패여 울퉁불퉁한 비포장 둑길을 따라 내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호기심은 있었지만 무례란 생각에 고개를 돌리고 조금 있자니 내 등뒤에 이르러 리어카가 멈춰서고 그 속에서 물건을 찾느라고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다시 돌려 보니 그 엿장수가 장총을?... 아니 낚싯대 하나를 꺼내드는게 아닌가?. 나는 속으로 "별 괴상한 엿장수 다 보겠네"하고 있는데 내가 있는 곳으로 내려 오더니 "고기 좀 됩니까?."라며 살림망을 들추어 보았지만 그의 어투에서 고기잡을 욕심은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냥 시간 보내려고 왔습니다. 가끔 손바닥만한 놈이 물기도 합니다만..."하는 내 대답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지렁이 몇마리만 얻읍시다" 하기에 "저는 떡밥을 씁니다"고 하며 주물러 놓은 떡밥을 한쪽 때어 건내면서 그를 자세히 쳐다보니 나보다 대여섯은 더먹어 보였지만 나의 짐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아직도 한참은 젊은 나이였다. '다부지면서도 착해 보이고, 엿장수로는 어울리지가 않는데...'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내곁에 나란히 자리잡고 앉아 떡밥을 달아 낚싯대를 던져 놓고는 "여기는 참 조용하네요"라고 말을 건내더니 묻지도 않은 말들을 늘어 놓기 시작하였다.
"원래 고향이 여깁니까?." "아닙니다. 저는 부산이 고향입니다." "제 고향은 경북 상줍니다." 산자락을 등지고 앉아 마주보는 가을 들녘엔 잘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채 석양에 물들어 가고 주위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어 가끔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가 잦아들면 갈대숲 속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벌레소리 조차 뚜렷이 들려오는 적막하나 그런데로 아늑함이 느껴지는 둑가에서 이렇게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날이 어두워져 찌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까지 계속되었고 나는 가끔 고개만 끄덕이며 시종 거의 듣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이번이 전국일주 세번쨉니다" "먼저 돌면서 못 가본 구석을 일부러 찾아서 돌아다니고 있는데" "엿구루마만 끌면 못 갈데가 없어요" "읍정도만 되어도 고철상이 없는데가 없지요" "일단 어느 지방에 도착하면 고철상 부터 먼저 찾아요" "엿구루마만 끌고가면 대부분 재워주고 먹여주지요" "낮에는 이동네 저동네 돌면서 고물을 모아다가 가져가면 일부는 엿으로 바꿔주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주지요" "엿장수가 점심 사먹고 담배 사피는 것 말고는 돈쓸데가 있겠어요?. 내가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면 골목골목 안가본데가 없고..." "그때쯤 되면 또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렇게 돌아다니고 있지요." 이렇게 말할 때 까지만 해도 그의 목소리에는 다소 활기가 있었다.
하지만, "몸은 좀 고달파도 마음은 편해요"라고 말을 뱉어 낼 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얼굴에는 나이 보다 일찍 깊어진 주름위로 언듯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가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의 목소리에는 지금껏 그가 지고 다녔던 고단한 삶의 무게에 지친 한숨이 섞여있음이 느껴지고 부터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우리집은 농사를 짓는데, 한 사십마지기는 더 될겁니다," "내 어릴적에는 근처에서는 제법 부농이란 소릴 들었지요" "맏이로 태어나서 고생은 전혀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릴적 부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멀리 기차 지나가는 것만 봐도 나도 모르게 자꾸 어디론가 가야 된다는 막연한 생각에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어요" "결국은 고등학교도 못 마치고 집을 뛰쳐나와 떠돌기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중국집 배달도 하다가, 구두닦기도 하다가..." "우연히 엿장수 한사람을 알게되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게 나한테는 딱 맞는 직업이다 싶어 리어카 하나 장만하고 그 길로 엿장수로 전국일주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나중에사 알았지만 내가 집을 나오고는 우리 아버지가 장손을 잃었다고 거의 실성하다시피 해서는 나를 찾겠다고 몇달 동안을 대구, 서울, 부산으로 해서 큰 도시 마다 거의 다 헤매고 다녔다고 그러데요"
"그러다가 몇해가 흘러 경기도 파주의 한 동네에서 그 동안 몰라보게 늙으신 아버지와 딱 마주쳐 꼼짝없이 붙들려서는 집으로 잡혀 갔는데" "아버지도 '지가 살았으면 한번이라도 소식이 있었을텐데 여지껏 소식이 없으니 죽었나 보다'고 막 포기할 무렵에 군에서는 영장이 나오고, 동네 사람 하나로 부터 포천에서 엿구루마를 끌고가는 나를 똑똑히 봤다는 소리를 듣자 그 길로 나를 찾아 포천으로 와서 여관을 정하고, 사흘을 헤맨 끝에 기어이 나를 찾았다는 겁니다." "그 말을 하시는 아버지 눈에는 이전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눈물이 가득 고이는 모습을 보고 나도 가슴이 찡하데요."
그때 까지 듣고만 있던 나는 그 말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못할 짓 하셨네요"라고 하고는 스스로 놀래 눈치를 보니 그는 나의 말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지만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 보다는 나이도 많은데...
"군에 가서도 별 고생은 없었습니다." "내가 안해 본게 있습니까?. 그러니 고참들 눈밖에 날 것도 없고..." "제대해서 집에 와보니 아버지가 참한 색시감 하나를 구해놓고 나더러 선을 보라 하고는 막무가내로 결혼 날짜를 잡아버렸어요." "결혼 날짜가 가까와 지면서 식구들이 교대로 보초를 서는 겁니다." ""저놈 또 달아나면 우리집안 이제는 끝장이다"라며 아버지가 한시도 눈을 안떼는데다가..., 사실 내눈에도 색시감이 곱긴 곱습디다." 그러면서 그는 계면쩍은지 내쪽으로 씩 한번 웃어보였다.
"그래서 나도 마음을 잡고 일년 가까이를 버텼는데 그놈의 몹쓸 병이 기어코 도져 한시도 그냥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만삭이 다 된 색시를 버리고 또 다시 도망을 나와 버렸지요"
벌써 몇번째인지 또 다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는 모습을 보며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조심스레 눈치를 보아가며 말을 건내니 "글쎄요, 나도 도대체 내마음을 알 수가 없어요. 내 나이도 이제 서른둘인데 언제까지 이짓을 하며 세상을 떠돌아 다닐런지." 그가 고개를 들어 초점없는 눈으로 북녘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자 나도 덩달아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마음속으로는 "상주면 여기서 북쪽으로 한참을 가야지..." 하면서 가 본적 없는 시골마을을 떠올려 보고, 아직도 그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착하디 착한 그의 색시의 모습을 그려보고 있는데,
"벌써 어두웠네요, 이제는 가봐야지요" "쓸데없는 이야기 늘어 놓아 낚시 훼방만 놓았네요"하면서 일어서서 낚싯대를 접고는 "고맙습니다"라고 알듯 모를듯한 인사를 남기고 왔던 길을 되짚어서 어둠속으로 멀어져가는 그의 어깨위에는 그 자신 조차 원인을 알 수 없는 그의 인생에 지워진 짐이 무겁게 내리 누르고 있음을 보고는 안타까움에 나도 모르게 깊은 탄식이 새어나오고 나 자신 몸이 잠시 가볍게 부르르 떨림을 느끼고는 뭔가에 쫓기듯 황급히 채비를 거두어 몹시도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도착하여 얼른 방으로 뛰어 들어가자 불을 때지 않았는데도 따뜻한 온기가 나의 온몸을 감싸고 돌아 나는 비로소 깊은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가끔 갯바위에서 저녁을 맞으며 멍하니 노을을 바라보다 보면 그때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르곤 한다. "그 사람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편으로는 그날 이후 지금 까지 내가 살아온 날을 되돌아 보게된다 일상에 쫓겨 별 생각없이 하루하루를 살아온 나. "그때 그의 모습과 지금 내 모습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그때 그 사람은 나와 만난 이후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는 가족들을 만나 오손도손 살았으면 아주 좋으련만..." 지금이라도 다시 그를 만나 이제는 소줏잔이라도 마주하면서 그날 이후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한번 꼭 들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