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집은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 (내 입장에서는 볼 수가 없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기껏 식사시간 전후 잠시간 아이들의 기분전환을 위한 켜기. 그리고 끄기. 9시 뉴스, 볼 때도 있고 안 볼 때가 더 많고. 내가 좋아하는 다큐멘터리 프로나, 영화관에서 놓친 보고 싶은 영화 비됴도 최소음량으로 식구들 곱지 않은 시선을 감내하고서야 겨우 본다.
그러니 당연히 TV도 모노와 컬러로 제 기분 따라 변하는 골동품과에 속하고, 그 흔한 케이블TV나 위성수신 장치도 없을 수밖에. 그러나 내년까진 바꿀 생각이 없다. (이는 내가 무슨 결벽, 대중매체를 무시하는 고씨 돌림이어서가 아니고, -고상, 고매, 고고 등속 - 순전히 우리네 전쟁과 같은 교육현실 때문이다.)
2 이번 조행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러한 우리 집 일상 습관에 도움 받은바 크다. 왜냐면, 이번의 그 엄청난 사고를 제대로 알고서는 식구들 등살에 그리 순순히 낚시를 갈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와 유사한 사고의 경험을 가진 우리 집으로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내가 사전에 농간을 좀 부렸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14일 일요일 아침. 며칠 후 장박의 출조계획으로 그즘의 나의 은근한 관심의 초점은 당연히 기상상황이었는데. 6시 조금 전에 눈을 떠 거실로 혼자 나와 TV를 켜니, 이번 사고의 비보가 헤드라인으로 뜬다. 제발이 저린 나는 조용히 볼륨을 줄이고 자세히 들어볼 수밖에.....
가슴이 무거웠다. 그리고 몇 년 전 그 악몽 같던 기억이 생생하게 파노라마로 스쳐갔다. 잠시의 침묵으로 이번 사고로 가신 분들께 애도를 드린 후, 다시 한 번 깊숙이 그리고 진지 하게 나의 낚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그 사고 후 나는 나에게 있어 낚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을 내렸었고,(내 운명과 낚시와의 함수관계 같은 것) 그래서 낚시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나름의 기준을 가졌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세월의 힘이란....
계속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고뇌는 내게 있어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적어도, 이즘의 내 낚시 행태의 일부 변질에 대한 반성의 계기는 되었고, 마음을 다잡는 귀중한 선물을 가신 분들로부터 받았다. 다시 한번 그 분들의 영면의 평화와 명복을 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뉴스를 보게 되면 식구들 관심을 돌려 채널을 슬쩍 바꾸어 버리고, 아침 일찍 조간의 사고 면을 혼자서만 유심히 보고 없애버리는 방업으로.
그래서 나는 아직도 아내가 그 사실을 제대로 아는지 모르는지 잘 모른다. 왜냐하면 서울살이란게 그만큼 바다와 멀리 떨어져 남의 일인 듯 하고, 번잡하기도 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쇼는 계속되어야하고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생이니까. (그러니까 이러한 사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경우다. 그 복잡한 속내를 여기서 다 얘기함은 무의미하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당연히 자기의 판단과 기준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셔야만 한다. 결코 바람 잡을 목적이 없으며, 아시다시피 아무도 자기 행동에 대한 근본적 책임은 져주지 않고, 책임 질 수도 없다. 그것 또한 인생이다.)
3 내게는 좋은 낚시 스승 두 분이 계신다. 존경해 마지않는 인생의 스승이기도 하시다. ‘계신다.’ 는 이 현재형은 맞지 않다. 그 중 한분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분이 나보다 5살 위인 나의 종형이시다.
몇 년 전 8월 1일, 일요일 아침.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비의 시원함에 취해 나는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집 사람이 몇 마디 의례적인 인사말을 주고받더니, 대수롭지 않게 수화기를 건네준다. 평소 대단히 침착한 성격이어 나를 감탄하게 하던 그 형수가 예의 그 침착한, 감정을 억제 한 목소리로 혹시 TV보셨느냐고 했다. 아니라 했더니. 지금 TV를 보니, 아무래도 사고가 난 장소가 형이 낚시 간 지역과 같아 혹시 몰라 전화를 하는 것이라 했다.
‘설마 무슨 일 있겠어요’. 하고 안심시키고 전화를 끊은 후, TV를 켜니 아뿔싸 이건 보통 상황이 아니다. 방송마다 온통 다급한 목소리의 재해비상방송 뿐이다. 여기저기의 지역방송 특파원들이 분주하게 사고소식을 전하지만 행선지도 모르는 나는 어디에서도 속 시원한 정보를 들을 수 없었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한동안 화면을 지켜보다 혹시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디로 갔어요? 불안감을 감추고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파로호로 갔어요.’ 30분쯤 방송을 들었지만 그쪽지역 상황은 나오지 않는다. 다시 30분. 통신두절로 구체적인 정황 보도없이 그 지역에서 몇 명의 사고가 있는 것 같으며 낚시꾼으로 신원미상이란다.
10시, 무조건 출발했다. 낚시꾼이 얼마나 많은데, 설마 형이려구. 라디오를 켜고, 마음을 다잡고. 춘천을 다가서도 구체적 정보는 들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도 비는 세차게 내리고. 폭우로 불어난 물로 국도는 부분부분 침수되어있고.
13시, 화천경찰서. 여기서도 구체적인 정보가 없다. 분통이 터졌다. 다시 구만리 선착장. 형 낚시일행 가족 분들과 회사직원 20여명이 먼저 와 있었다. 구체적 정보를 들은 모양이지만 그것도 아마도 였다. 암울했다.
14시, 아직까지 경찰 한 명 없고 의경 한둘만 가족들 질타에 멀찍이 물러나 강 건너 불구경 이다. - 그 졸병이 어쩌겠는가. 애가 탄 가족들이 직접 나서 배를 수배하자, 그 와중에서도 관리 인듯한 자가 규칙운운하며 운항불허란다. 바다도 아닌데. 파도도 없는데. 바람도 없는데. 할 수 없다. 관계요로에 전화해 경비정 군함이라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자, 전화를 받은 그 작자, 여객도선 한척을 선심 쓰듯 허가한다. 그렇지. 그들과 애타는 유족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 그런데 이번엔 이 놈의 선장, 배 삯을 누가 내냐며 버팅긴다. 그 말도 맞다. 이 나라에서는. 비상구난시스템마저 이 지경인데, 행정책임자란 자는 융통성 하나 없이 평소의 규칙을 운운하는데. 두 세배, 백단위의 비용을 가족들이 지불하고 배를 띄웠다. 기사 한분 포함 5명의 일행, 4분 모두 예전 한 솥밥을 먹던, 중견업체 대표들이다. 그런데 방송 카메라는 그렇다 치고, 이 놈의 경찰은 왜 이배를 타누. 아마 대한민국은 몇 명의 유족들보다 돈이 더 없는 모양이지. 참자.
15시, 비 맞으며 절규하는 낚시객을 태우러 호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다 스크류에 그물이 걸렸다. 동승한 경찰의 힘인지, 관계요로의 힘인지. 특수부대 출신 다이버가 금방 쾌속 보트를 타고 와 그물을 잘랐다.
한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30여명 모두 깊은 침묵으로 그 호수와 빗줄기만 바라볼 뿐. 함께 누빈 낮 익은 풍경들이 하나 둘 지나가고, 그 깊은 물, 깊은 산. 장엄한 산정의 폭포. 부유물에 외다리로 한없이 고개를 떨구고 서있던 한 마리의 회백로. 자꾸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팔다리 하나 없어도 좋으니 제발 살아만 있으라고, 이름 나온 사람은 그렇다 하더라도 이름 틀린 형만은 살아있을 것이란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16시 30분.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다. 산 사태였다. 나이도 지긋하고 분별력을 잃을 분들이 아니니. 괴기 한 마리 때문에 무모했을리는 없고. 새로 말끔히 단장한 일자형 민박집 반이 칼로 자른 듯 형체도 없어져 있었다. 새벽녘이었다 한다. 시신은 평화의 댐 부근에서 오솔길을 개척해 들어온 장비로 발굴되어 119 흰 천에 덮여 비속에 누워 있었다. 그렇게 갔다.
4 그 형에게는 홀어머니가 계신다. 홀어머니도 보통 홀어머니가 아니다. 6.25때 낙동강 전투에서 행불이 된 삼촌(고향이 인근이다.). 그러니까 유복자다. 핏덩이 하나를 얻고 청상이 되신 숙모님의 삶은 눈물겹다. 그 형이 중학교를 진학하면서 고향의 전답과 정미소를 정리해 도회지로 이사를 갔다. 첫 번째 집은 도시계획 편입으로 날려버리고 나머지 재산은 사기를 당해, 공장에 다니시며 그 형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면서도 반공방첩 성냥을 들고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형사 나으리들로 하여 속도 많이 끓였을 것이다. 꿋꿋했다. 건실하게 자랐다. 그 어려운 살림에서도 싫은 내색 한번 없이 친척들 방문을 웃음으로 맞아 주었다. 시골에서 유학 온 나는 국민학교 고학년 2년을 그 집에서 살았다. 그때 이미 그 형의 영향으로 웬만한 소설책을 읽었다. 그 당시 형에게 회초리도 맞았다. 그 후로 지금까지 앞서거니 뒷서거니 고만고만하게 가까이 살며 웬만한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냈다. 장례, 남은 자들의 암울. 참담함. 더 말해 무엇하리요. 가슴에 자식을 묻은 그 숙모님은 내가 아무리 권해도 벌써 몇 년째 두문불출이시다.
5 내가 왜 다시 생각하기도 괴로운 이런 가정소사를 그것도 상세히 말한다 생각하는가. 사고의 경험은 피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모두가 각성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고로 가만히 생각해보니, 널리 알림이 묻는 것 보다 고인의 죽음을 그나마 위로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이다. 낚시꾼의 죽음이란..... 아니 낚시하다 죽으면 정말 말 그대로 개죽음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형이 열심히 노력하여, 운영하던 기업체는 형수가 대표를 승계하고 적으나마 건물 한 채도 있어 경제적으로는 크게 곤란을 격지 않고 있다. 그나마 없었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그리고 그중한분은 사체를 못 찾고 일년이 지났는데 만 일년이 지나서야 기적적으로 그 자리에서 떠올라 그때서야 수습할 수가 있었다. 그간 속 다 탓을 남은 가족들을 한번 생각해 보라.... 그리고 파렴치한/ 파락호가 아닌 담엔 살아 같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도움이 된다는 걸 그대는 아는가? )
P.S 만약 운영자 분께서 이 글을 읽는다면 제안을 하나 하고 싶다. 앞 분들의 글을 이번 주 월요일쯤에 한번 쭉 읽어볼 수 있었는데 안전에 관한 살아있는 알찬 정보가 참 많았다고 생각한다. 이 사이트에서 구슬을 궬 수 있는 자리를 한시적으로나마 마련해주면 참 좋을 것 같단 생각이다. 그래서 ‘바다낚시 안전 10계명/20계명’ 뭐 이런 제목이라도 괜찮고. 다양한 경험과 노하우를 수렴 정리해 방문객이 하시라도 크릭해 보고 귀중한 생명을 하나라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값진 일이겠는가.
먼저 나의 경험 1. 구명조끼 해부 한20년 전 해수욕장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 들어본 경험이 있는데 아무리 몸통을 조여도 구명조끼는 뜨고 내 몸은 밑으로 빠지더라는 사실 -> 이로 미루어보면 다리사이로 밑 벨트를 채우지 않은 구명조끼는 그야말로 아무 쓰잘데없는 무용지물. 그리고 이 벨트 역시 밑으로 최대로 당겨 죄어야 겨우 물속에서 얼굴이 나오니 배 탈 때, 기상악화시 꼭 유념바람. 이런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