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아파트 담벼락 밑엔 까맣게 얼굴이 그을린 할머니 한 분이 봄볕에 조는 병아리마냥 꼬박꼬박 졸고 계셨다. 연세가 얼마나 드셨는지 까만 얼굴에 깊은 주름살은 족히 팔순은 넘어 보이셨다. 그의 앞에는 낡은 플라스틱 소쿠리에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애기고추가 고봉으로 담겨져 있었다. 할머닌 연신 오가는 사람들을 향해 고추를 사 가라며 손짓을 하지만 실제로 그 고추를 사 가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가끔 새댁으로 보이는 젊은 아줌마들이 지나가다 호기심에 다가가지만 이내 발길을 돌려 나오곤 했다. 싸늘한 콘크리트 축대와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내내 할머니의 옷깃을 훑고 지나갔다. 한동안을 그렇게 혼자 나와 계셨는데 어느 순간부터 담벼락 아래엔 또래 친구처럼 보이는 몇 분의 할머니들이 상치며 파, 깐마늘 등을 가지고 와서 팔기 시작했다. 초라한 모습에 뿌리에는 아직 흙무더기조차 채 털지 못한 것들이 한눈에 보아도 여느 장사꾼들처럼 빛깔 좋은 그런 물건이 아니라 할머니들의 집에서 농사 지어 가지고 온 그런 물건들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 텃밭에서 조금씩 나오는 채소를 소일삼아 시간도 보낼 겸 가지고 나오는 것 같았다.
"할머니, 고추 이거 얼마예요?"
"천 원"
"할머니, 반만 주세요."
"반씩은 안 팔어."
"너무 많은데......"
늘 지나치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때만 해도 차취를 하던 때였기 때문에 몇 번 정도의 먹을 반찬 말고는 쉬어 버리는 게 다반사였다. 대부분은 밖에서 사 먹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할머니, 그럼 주세요"
할머니는 비닐 봉지에 고추를 담으며 인심이라며 몇 개를 더 담아 준다.
" 할머니, 잠깐만요."
나는 비닐봉지에 담긴 애기고추를 주섬주섬 반을 덜어 할머니 소쿠리에 다시 담았다.
할머니는 화가 난 듯
"반씩은 안 판다카이?"
"할머니, 그게 아니구요, 저 이거 다 가져 가 봐야 저는 반은 버릴 게 뻔하니 차라리 반은 놔두고 갈게요."
할머니는 언듯 계산이 서질 않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더 달라는 사람은 있었어도 덜 가져 가겠다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 저는 이것만 가져가 먹어도 며칠을 먹을 수 있으니 남은 것은 또 파세요."
"아이고 총각, 복 받겠다 복 받겠어! 우예 이런 총각이 다 있노?"
그제서야 말귀를 알아들은 할머니는 손을 잡으며 연신 고맙다며 기어코 몇 개를 더 집어 주신다.
나는 뜻밖으로 오백 원 정도의 값어치가 이렇듯 클 줄은 몰랐다. 할머니를 도우겠다는 생각이나 적선을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닌데 적어도 내 기준으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 할머니들에겐 오히려 젊은이의 따뜻한 호의로 받아졌나 보다.
그때부터 나는 반만 가져오는 사람이 되었다.
"총각, 왔는가?"
"예 할머니, 고추 좀 주세요."
"또 반만 가져 갈겨?"
"예"
"자꾸 그라마 내가 미안하지."
"할머니, 괜찮아요. 어짜피 저는 제가 먹을 양만 가져 가는 걸요."
할머니 옆에는 아직 풀어 놓지 않은 고추가 검은 비닐 봉지 안에 쌓여 있다. 늘 한 봉지씩만 가져오는 고추. 하기사 한 봉지밖에 되지 못하는 양이지만 할머니에겐 그 무게가 어쩌면 최대한 가져올 수 있는 무게인지도 모른다. 팔아야 일이만 원 정도도 안 되는 분량 그것을 이고 와서는 종일토록 그 담벼락 밑에서 세상을 보내고 계신 것이다.
어머닌 곧잘, 밥숟가락 하나 없는 집으로 시집 와서 이만큼 이루었노라고 말씀하셨다. 몇 번의 사선을 넘나드는 수술 후유증으로 몸하나 성한 곳이 없는데도 어머닌 보따리를 들고 나가시면 밤 늦게 들어 오셨다. 훗날에야 그것이 길거리를 떠돌며 장사를 하는 행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60년대를 넘던 시절, 누가 더 잘 살고 못 살고가 있었겠냐만 적어도 어머닌 떠나던 그날까지 고기 한 점 마음 놓고 입에 넣으신 적이 없었다.
한번은 서문 시장엘 짐꾼처럼 따라 다닌 적이 있었다. 어머닌 가끔 거기서 장을 보셨다. 어물전이 있는 난전으로 가신 어머닌 갈치를 몇 마리 사시고는 거기에 남아 있는 갈치 꼬리를 담아 달라 하셨다. 다른 사람들이 토막을 내고 가져가지 않은 꼬리를 모아 놓은 것이었다.
"엄마, 그건 말라꼬?"
"이거 다 가지고 가면 쓸 데가 있데이."
집에 개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구에게 줄 것도 아닌데, 내내 궁금하였지만 저녁이 되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어머닌 갈치의 몸통은 자식들의 밥 위에 골고루 올려 놓으시고 대신 어머닌 갈치 꼬리를 바싹 구워 과자처럼 뼈 채로 씹어 드셨다.
"아이고, 엄마, 치아라. 그걸 말라꼬 묵노? 이거 묵어라."
"야야, 갈치 꼬리가 얼메나 맛있는데......"
--계속--
---버들피리---
racemin: 참 따듯한 이야기 입니다. --[11/29-16:22]--
4go7nom: 으음... 눈물 나올려고 합니다. --[11/29-17:10]--
다부래기: 저희 장인께서 그러시더군요.. 이제 나이가 드니까 왜 어른들은 물고기가 머리와 꼬리가 젤로 맛있는지 인제야 할겠다고 말씀하시데요..그러시며 슬며시 돌아가신 처할머니 방으로 가셔서 누우시던 뒷모습이 가슴한켠에 자리잡았는데 .... --[11/29-19:53]--
잡고기: 본인은 농촌에 살고 있는데 우리 어머님같이 느껴지고 정이 넘치네요.항상 건강하시길.... --[11/29-2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