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생각만 해도 아릿한 그리움으로 가슴설레는 미답의 처녀지 하나쯤은 남겨 두는게 좋다. 그것도 너무 멀어 마음은 있어도 번잡한 준비나 절차로 쉬 실행이 어려운 그런 요원한 곳이 아니라, 가벼운 결심만으로 바로 실현이 가능한 그런 가까운 곳이라면 더욱 그 가치가 더하다. 그래서 때로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들때, 복잡하고 심난스러울때, 또는 열심히 일한 후 잠시의 휴식이 필요할 때, 훌쩍 떠날 수 있는 그런 장소 하나쯤 곁에 남겨둔다는 건 얼마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가.
낚시를 한다는 소위 꾼으로서의 내게 추자란 바로 그런 곳이었다. 갈수록 사나워지는 낚시인심과 환경의 피폐로 낚시가 힘들거나 회의가 일때마다 그 옛날부터 익히 들어온, 그래서 어느새 구원처럼, ‘그래, 추자에만 가면.’ 하고 나직이 읊조리게 되는 이 섬은 이제 신비와 경외감까지 더하여 이미 내게 상상속의 파라다이스였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던 낚시질 이십년에 아직도 추자도정 한번 없었다면 그 낚시의 행태나 스타일이 안 봐도 알조인 얼치기 꾼이란 건 누구나 금박 알아차리겠지만, 지난 연휴 삼일.
퇴근 시, 가끔씩 들러 소품 한두 개 사며 또 다른 낚시의 재미와 손맛을 즐기던 동네 낚시 가게가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버려, 뭔가 섭섭하고 허전한 맘을 금할 수 없던 차에 그 가게 총무로부터 전화가 왔다. 추자로 가자나. 과장된 너스레들과 치기, 은근한 과시 또는 강권, 패거리의 농단류의 좋지 않은 예전기억들을 (예전동네에서) 갖고 있던 나는, 몇 번의 그 마음 좋은 총무님 동행출조 권유를 적당히 웃음 으로 고사하며, 동참한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기상, 예보, 시간 등 몇 가지 기본사항을 체크해 본 후. ‘그럼 한번 가보지 뭐.’ 하고 선선히 동참을 결정하였었다.
첫인상
배가 속도를 줄이자 비몽사몽중에 갑자기 선실 밖으로 나온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바로 어슴푸레한 미명속에 날카롭다 못해 괴기스럽기 조차한 그 부속 섬들의 그로테스크함이었다. 아니, 여기 南島아니던가? 상록활엽교목들로 가득한, 그래서 풍성하다 못해 원만하기까지 한 그런 모습은 관두고라도 부드런 곡선의 육산(肉山), 즉 肉島쯤은 하나 있어야 하는 것 아닌 가? 낮 설다. 이게 아닌데. 설어도 너무 낮 설다. ‘파도와 바람이 장난이 아닌 곳이어서 그럴수도 있겠지.’ 하고 마지못해 수긍하다, 그럼 울릉도는? 제주 부속섬은? 팔라우는? 열 이레달도 구름 속에 숨어 없고 바람마저 스산하다.
(첫날은 사자허리쯤에서 열심히 망중한을 즐겼다. 비록 숭어3마리였지만 묵직한 손맛은 보았으니 되었고, 철수길 그 섬 머리, 꼬리, 부속여들을 둘러보며 험준한 바위섬, 그 악(岳) 특유의 압도하는 듯한 위용이 나름대로 좋았다. )
군상들
아니, 이건 또 뭔가? 포구에 들자. 갑자기 또 묘하게 분위기가 수상하다. 가득한 사람들. 무신 사단이 생긴게 분명해. 이 조그만 섬 마을, 집도 몇 채 없구만. 웬 사람들이 저리도 많아. 저기 한 가지 통일된 은빛복장으로 일렬로 도열해 들어오는 배마다 연신 90도 각도로 절을 해대는 저들은 설마 외계인? 아니지. 허벅지까지 다 내놓은 짧은 미니스커트의 큰 애기까지 있는 걸 보면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인데. 에끼! 사람들. 아무리 남도라지만 아직 치운 음력 정월인데 옷이나 제대로 입히고 따스한 미소로나 맞으면 더 좋겠구만. 기껏 피해 온 어쭙잖은 문명의 찌꺼기를 여기서도 보게 하다니.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어설픈 영화촬영 세트장이야. 장총 찬 장고들이 떼거지로 몰려다니네. 권총, 장총. 다연발 기관총. 어디 로켓포 같은 건 없나? 주연 조연 엑스트라 할 것 없이 모두 어머어마, 무시무시한 나름의 무기를 뽐내며 모두 제가 가장 빠르다고 어깨에 잔뜩 힘주고 어스대는데. 저기 증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었을 법한 머리 희끗희끗한 노 고수님. 이제 막 배운 제조를 뽐내고 싶어 과장된 모션으로 오버하는 풋내기 총잡이들. 덥수룩한 수염에 온몸에 비린내 풀풀 풍기며 엄지손톱보다 휠 큰 비늘을 달고 다니는 형형한 눈빛의 저 장년의 총잡이는, 보아하니 한 한달쯤 여기서 눙친 몰골인데.
애구 무셔라. 감춰둔 투시안으로 들여다보니(일명 관심법이라나), 웬갖 물고기 귀신들이 잔뜩 붙어 아무리 부처님께 빌어도 천당가긴 이미 틀린 듯 한데...... 그런데 이 사람들 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이야. 얼굴색 비슷하고 말소리가 같은걸 보면 한 무슨나라 사람인건 분명한데, 웬 무대의상은 모두 다이마, 시노마, 가마스끼 이런 얄궂고 희안한 이름의 걸로 어쩌면 저리 똑같이 맞춰 입었을까? 신기하기도 해라. 천편일률도 이런 천편일률은 없구나. 그리고 또 웬 놈의 사장은 그리 많은지, 어느 노래 가삿말이 무색한데. 내보기 짜장면집 사장이 반은 되는 것 같더라. 각설하고. 이상타 못해 기묘하기까지 한 이 모두가 얼부러져 술렁술렁, 왁자지껄 걸판지게 돌아가는데. 이거야 원 정통 서부극도 아니고, 엉터리 짬뽕 마카로니웨스턴 셋트장이 따로 없더라.
아, 이제야 조금 감이 잡힌다. 이 섬이 왜 이리 을씨년스럽고 황량해 보이는지. 서글픔마저 밀려드는데, 돌아서서 나를 보니 내 꼬락서니 또한 그들과 진배없어 더욱 욱기는 짬뽕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