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동안의 휴가를 갖게 되었다(공식적으로는 3년 만이다). 휴가 동안 어디든지 가볼 요량으로 여기 저기 연락을 취했건만 도무지 시간이 맞질 않는다.
추자도는 대부분 목요일 출항, 토요일 철수란다. 여서도는 아예 목포에서 출조점을 찾기가 힘들다. 만재도나 태도도 생각해 봤지만, 너무 멀다. ㅠㅠ 게다가 날씨마저 예보 상 금요일을 기점으로 점점 안 좋아진다. 결국 낚시를 포기해야 하나? 낚시를 못 간다면 휴가도 있으나 마나.
며칠 동안의 설레임과 흥분은 타이밍과 기상 여건으로 인해 결국 낙담과 좌절로 바뀌고 말았다. 휴가대신 다시 일터로 나간 토요일.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있겠나. 만사가 귀찮고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오후 4시 즈음에 동호회 후배 어부지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행님, 어디 안 갔소?” “암디도 못가고 일하고 있다.” “행님, 빨리 준비 하씨요야.” “어디? 만재갈라고?” “아니라, 태도 갑시다. 뺀찌 잘 나온다요.” “그래? 몇 시까지 가면 돼냐?” “배가 한 시에 나간당께 12시까지는 오씨요.” “그래야. 그럼 가게서 그 때 보자.”
서둘러 일을 접고 집으로 향했다. 태도도 떠 올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왕복 7시간이라는 뱃시간이 부담스러워 열외로 치고 있었지만 지금은 어디론가 낚시를 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모든 부담들이 씻은 듯 사라졌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채비를 준비하는데 이것저것 따지고 챙기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기본으로 낚시 가방에 릴, 소품용 작은 가방을 넣고, 밑밥통에 갯바위 신발 담고, 아이스박스에 커피 등 기본 먹거리를 담고 보니 이고 지고 들고 갈 기본 짐만 3개다. 차 없는 뚜벅이로서는 적지 않은 짐이지만 마침 아내가 만재낚시점까지 차로 데려다 준다니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정확히 12시에 만재낚시에 도착했다. 어부지리님은 벌써 나와서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메, 행님. 뭔 짐이 이렇게 많다요?” 가볍게 낚시하러 가는데 메고 들고 지고 가게에 나타난 내가 자못 이상해 보이는 모양이다. “그래도 갯바위 나가는디 이 정도는 준비 해야제.”
원래는 태도에 몇 분 손님을 내려드리고 나와 함께 갯바위에서 대 여섯 시간의 낚시를 하려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사정이 약간 달라졌단다. 때마침 만재로 들어가는 분이 있어 어쩔 수 없이 태도를 경유해 만재까지 가야 한단다. 대충 태도까지 3시간 반에 다시 태도에서 만재까지 1시간 반, 도합 5시간을 배를 타야 한단다. 태도 3시간 반까지는 어떻게 참아 보겠는데 5시간이라니. 갑자기 막막했다. 게다가 어부지리님(내 갯바위 낚시 스승뻘인 후배인지라)과 간만에 갯바위에 설 거라는 기대도 깨지고 말았다. 만재까지 배를 몰고 갔다가 다시 나올 걸 생각해 갯바위에서 함께 낚시를 하기는 무리라는 것이다. 이를 어쩐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잔뜩 짐까지 꾸리고 나온 마당에 다시 집으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어부지리는 다섯 시간 동안 배까지 몰고 가는 데 나는 고작 선실에서 잠이나 잘 거면서 무슨 부질없는 생각이람.
어부지리님께 지금 만재에서 낚이는 어종에 대해 물었다. “뺀찌 씨알 좋아라우. 참돔도 가끔 올라오고.” 그런데 또 한 가지, 미끼는 홍갯지렁이를 써야 한단다. 으윽. 나 그거 무지 싫어하는 데. 뭐 어쩌겠는가? 로마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크릴도 한 개 담았다. 밑밥이 크릴인데 설마 아무 반응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새벽 1시. 목포 북항을 빠져나온 배는 밤바다를 미끄러지듯이 달린다. 선실 바닥으로부터 들려오는 배의 엔진 소리에 온 몸이 요동친다. 만재 날씨는 어떨까? 어느 자리에서 낚시를 하게 될까? 온갖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러는 어느 순간 잠이 들었나 보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배가 롤러코스터처럼 위아래 좌우로 요동친다. 몸이 저절로 좌로 굴러 우로 굴러에, 위로 뛰었다 아래로 앉았다 한다. 아이고, 잠은 다 잤구나. 그렇게 한참 여를 갔을까? 엔진 소리가 줄어든다 싶더니 요동치는 범위도 급격히 줄어든다. 일행 중 어느 분께서 반가운 말씀을 하신다. “아이고, 다 왔네요.” 시계를 보니 아침 6시 35분. 자그마치 5시간 35분 동안 배를 탄 셈이다.
선실 밖으로 나와 보니 만재항 부두다. 이게 얼마만인지. 꼽아보니 벌써 대여섯 해다. 유해진, 차승원의 삼시세끼를 보고 또 보며 그리고 그렸던 만재도. 일요일 한나절이나, 그것도 2주에 한번 씩 시간이 날까말까 한 나에게 만재도는 지난 몇 해 동안 그림의 떡이었던 셈인데, 오늘 용케 인연이 돼서 몇 해 만에 다시 찾게 된 것이니 어지 감개가 무량하지 않으리.
포인트 하선을 위해 다시 만재항을 빠져나오는데, 아이고 너울이 장난이 아니다. 좌우로 물이 배보다 높은 곳에서 삼킬 듯이 출렁인다. 배는 만재 북쪽을 돌아 서쪽으로 향한다. 오늘 바람은 동풍 내지는 동남풍. 서쪽으로 돌아가자 그나마 너울과 바람이 좀 덜한 듯하다.
이윽고 배가 닿은 곳은 외마도 배꼽자리(나중에 어부지리님에게 물어보니 그렇단다). 배에서 어부지리님이 말하기를, 발 밑 수심은 7미터에 왼쪽으로 흘리면 조금 낮아진단다. 갯바위로부터 3미터만 벗어나도 수심이 뚝 떨어지니 되도록 갯바위에 바싹 붙여서 흘리란다.
올라보니 발판이 왼쪽으로는 조금 경사가 지기는 했지만 설 자리며 짐 놓을 자리는 충분하다. 만재에서 내려 본 자리 중 발판으로는 거의 최고 수준이다. 흡족해하며 서둘러 채비를 한다. 2호대에 4호 원줄, 목줄은 3호. 3B 찌에 2B와 B봉돌 분납한 전유동 채비. 어부지리님은 1호 반유동으로 벽에 바짝 붙이라고 했지만 일단은 내 방식으로 해 보기로 했다. 그러다 입질이 없으면 어부지리님 조언을 따르리라.
채비를 끝내고 밑밥을 서너 주걱 넣어보니 오른쪽 곶부리로부터 돌아나온 물이 발밑의 반탄류와 만나 갯바위로부터 3미터 즈음에 경계가 뚜렷한 조경지대를 만들고 있다. 옳거니, 여느 낚시 방송에서건 말하는 바로 그 찬스렷다. 절차가 복잡한(?) 홍갯지렁이 대신 크릴을 꿰어 오른 쪽 바깥을 향해 캐스팅. 조경지대에 떨어진 찌가 살살 갯바위 쪽으로 붙는 순간 와라락 하는 입질이 들어온다. 반사적으로 챔질. 대 끝이 쿡 쿡 쿡 쿡 처박힌다. 으아. 그래. 이 맛이지. 발밑 턱으로 향하는 녀석을 살살 달래서 끌어내고 보니, 어라? 뺀찌가 아니라 감생이네? 채비가 채비인지라 일단 들어뽕 시도. 올리고 보니 약 35남짓한 사이즈. 만재도 명성에는 못미치는 크기지만 그래도 얼마만에 맛보는 만재도 감생이 손 맛인가!
그런데 갑자기 비가 후두둑 떨어진다. 어라? 예보에 비는 없었던 것 같은데? 다행히 갯바위가 머리 위쪽으로 모자챙처럼 튀어나와 있어 직접 몸에 닿는 비는 많지 않지만 문제는 낚시대에 원줄이 착착 달라붙는다는 것. 이래서는 전유동 채비로 줄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간간히 대를 털고 초리를 움직여 줄을 빼곤 하지만 그 때마다 채비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이 역력하다. 더구나 표층에는 작은 형광등만한 학꽁치가 드글드글하다. 채비를 멀리 던져 정렬 후 갯바위로 붙이려고 하지만 쉽지 않은 상태.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람마저 오른쪽 벽을 타고 몸이 흔들릴 정도로 사정없이 불어온다.
안 되겠다. 채비를 바꾸기로 했다. 원줄을 3호로 목줄은 2.5호로 낮추고 3B 반유동에 수심을 약 6미터에 맞추고 아래 채비를 조금 더 무겁게 하는 잠길 찌 채비. 원줄을 낮추고 아래 채비가 더 무거워진 만큼 원줄 빠짐이 훨씬 더 낫다.
그렇게 서너 차례 캐스팅 끝에 채비가 정렬 후 갯바위 쪽으로 붙어 찌가 스물스물 잠길 찰나 무언가 툭 치는 듯한 무거운 무게감이 손끝에 전해진다. 그와 동시에 2호대가 순식간에 바다를 향해 고꾸라진다. 뭐여.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대를 세우려 하지만 한 번 더 대가 고꾸라지는가 싶더니 발밑에 잠겨있는 턱에 원줄이 쓸려 그대로 터져 버렸다. 아. 심장이 쉼 없이 팔딱거리고 귀 뒤쪽으로 맥박이 쿵쾅거린다. 뭐였으까? 뭐였으까? 돌돔 4짜? 감생이 5짜? 참돔 7짜? 상상은 자유지만 상상만으로 위로하기에는 속이 너무 쓰리다.
심기일전하고 다시 몇 번의 캐스팅. 바람을 뚫고 날아간 채비가 징검다리처럼 파문을 그리며 수면에 떨어진다. 뭔가 좋은 예감이 든다. 채 찌매듭이 찌에 닿기도 전에 원줄이 순식간에 풀려나간다. 챔질. 녀석의 강한 저항이 느껴진다. 조금씩 끌려오면서도 오른 쪽 발밑으로 지칠 줄 모르고 파고드는 녀석. 얌먀. 2호대야 임마. 빨리 올라 와. 속으로 되뇌는 동시에 드는 의문. 근데 누구냐 넌?
올리고 보니 또 감생이다. 이 녀석은 좀 무게감이 있는 게 들어뽕은 무리란 생각이어서 뜰채를 폈는데 아뿔싸. 자리가 높아 뜰채가 수면에 닿질 않는다. 비에 젖은 갯바위, 더구나 경사가 진 곳을 뜰채질하러 내려가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에 어쩔 수없이 다시 한 번 들어뽕 시도. 첫 번 째 시도는 실패. 무게가 만만찮은데 줄을 제대로 못 맞춰서 올라오다 말고 다시 풍덩. 제대로 줄 길이를 맞추고 다시 들어뽕 시도. 겨우 올리고 보니 40은 돼 보이는 사이즈. 역시나 만재도 명성에는 비할 바 못 되겠지만 그래도 얼마 만에 맛보는 갯바위 4자인가. 감격 또 감격.
목줄 한 번 쓱 훑어보고 쓸린 데 없음을 확인한 후 다시 캐스팅. 그런데 학꽁치들이 채비를 던지기가 무섭게 달려든다. 이리 던지면 이리로, 저리 던지면 저리로. 참 귀신같은 놈들이다. 어쩔 수 없이 미끼를 홍갯지렁이로 바꿔서 다시 캐스팅. 몇 번의 캐스팅 끝에 다시 드르륵 거리는 입질. 그런데 챔질 타이밍이 안 맞았는지 헛방이다. 그것도 두 번이나. 무언가 느낀 바가 있어 홍갯지렁이 크기를 줄여서 다시 캐스팅. 왼쪽 벽을 따라 흐르던 찌가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원줄을 사정없이 가져간다. 이번에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금 늦게 챔질. 이번 녀석은 이제와 달리 바깥쪽으로 달아나려 한다. 이 녀석, 가긴 어딜 가. 드랙을 확인하고 쿡쿡거리는 녀석을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올리고 보니 진홍색 빛이 선명한 참돔이다. 그나마 사이즈가 작아 다행이다. 역시나 들어뽕. 바다의 미녀답게 이쁜 40전 후의 참돔이다.
그런데 비는 조금 덜하건만 바람은 점점 더 심해진다. 오른쪽으로의 캐스팅은 포기하고 왼쪽으로 캐스팅해 원줄을 두어번 크게 풀어 준 후 벽 쪽으로 채비를 흘리는 데 다시 벼락같은 입질이 들어온다. 대를 세우기는 세웠는데 녀석이 벽 쪽으로 붙는가 싶더니 꿈쩍을 안 한다. 느김에 틀림없는 돌돔급 뺀찌리라. 드렉을 아예 꽉 조이고 강제로 땡기려는 순간 허무하게 목줄이 날아가 버렸다. 그러게 목줄을 왜 바꿨어? 왜?
채비를 올려보니 2.5호 목줄이 중간부터 너덜너덜. 얼른 목줄을 3호로 갈고 미끼를 끼우기 위해 홍갯지렁이를 막 집어드는 순간 왱 하는 싸이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왼쪽 곶부리 쪽에서 배가 튀어 나온다. 벌써 철수 시간이 되었나?
만재낚시 최 사장님께서 얼른 갯바위에 올라 짐챙기는 걸 도와주신다. 서둘러 대를 접고 물건을 챙겨서 배에 오르려는데 어부지리님이 하는 말. “행님, 뜰채는 안 갖고 오요?” 서두른다는 게 그만 뜰채를 놔두고 다른 짐만 챙겼던 것이다. 너울 파도 속에 최 사장님과 다른 한 분의 도움으로 겨우 배에 오르고 보니 갯바위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너울이 장난이 아니다.
배에 계시던 분께서 조과를 보더니 “감생이를 잡아뿟네요.” 하신다. “그러게요.” 대답하고 선실로 가다보니 선미 쪽에 최 사장님께서 잡았다는 돌돔 10마리가 밑밥통 가득 꿈틀거리고 있었다. 10마리 모두 민장대로 잡았다고 하신다. 날씨만 받쳐 줬으면 마릿수를 기록했을 거라시며 자못 아쉬워하신다. 아쉽기는 나도 매 한가지. 그래도 어쩌랴. 안 좋은 날씨 속에 고기 욕심 부리다 사고라도 나면 절대 안 될 일이다. 낚시는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안전이 최우선이다.
무거운 몸을 끌고 선실로 들어가 누웠는데 너울에 배가 워낙 요동치다 보니 잠이 오질 않는다. 시계를 보니 아침 10시 반. 그렇게 만재도를 출발한 배는 다시 태도에 들러 손님들을 태우고 목포 북항으로 향한다. 자는 둥 마는 둥, 엎치락뒤치락하다 목포 북항에 도착하고 보니 오후 4시 반. 짐 내리고 보니 다섯 시가 다 돼 간다. 장장 12시간에 걸친 뱃시간이 막을 내린 것이다. 얼마 되지 않지만 내 낚시 인생에 있어 기록적인 승선 시간이다.
그럼 어떠랴. 그 넓은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홀로 3시간 반여 동안 낚시에 빠져 들 수 있었다는 게 더 황홀한 것을. 어쩌면 시무룩하게 보냈을 시간을 알차게 보내게 해 준 몇 분께 새삼 감사드린다.